오피니언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아시안게임의 시대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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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가 17일 개막했다. 다음달 4일까지 16일 동안 계속된다. 개막식에선 ‘대장금’으로 유명한 한류스타 이영애가 남녀 스포츠 꿈나무와 함께 성화에 불을 붙였다. 이 성화는 뉴델리에서 채화돼 참가국과 한국 전역을 돌아 인천에 도착했다.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던 제1회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처음으로 그곳에서 채화했다. 역사성을 강조한 이벤트다.

아시안게임이 태동한 곳은 영국 런던이다. 48년 7~8월 제14회 런던 여름올림픽에서 인도의 제창으로 대한민국·중화민국(현재 대만·필리핀·버마(미얀마)·실론연맹(스리랑카)이 참가한 아시아 6개국 회의에서 창설에 합의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의 중간 연도에 대회를 열기로 했다. 중국은 건국(49년) 전이었고,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런던올림픽에 전쟁 책임을 이유로 참가가 거부돼 6개국 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6개국 회의는 당시 인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두트 손디(1890~1966)가 제안하고 주도했다. 손디는 인도 초대총리 자와할랄 네루(1889~1964)의 아시아 단결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네루는 47년 8월15일 인도 독립일에 수도인 뉴델리에 아시아 독립운동가들을 모아놓고 아시아관계회의를 열었다.

각국이 독립하면 아시아 단합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열기로 했는데 거기에 스포츠 대회가 포함됐다. 서구열강은 전쟁을 벌여 인류 비극을 야기했지만 아시아 신생독립국들은 평화·공존·상호이해를 추구하면서 스포츠를 통해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의미였다. 아시아 각국은 49년 뉴델리에서 아시안게임연맹을 창설하고 50년 뉴델리에서 첫 대회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준비 관계상 대회는 51년에 열렸다. 한국은 6·25전쟁 중이라 참가하지 못하고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동참했다.

사실 2차대전 전에도 비슷한 대회가 있었다. 1913년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윌리엄 캐머런 포브스(1870~1959) 총독이 마닐라에서 1회 대회를 개최한 극동올림픽경기대회란 게 있다. 필리핀 스포츠선수협회장이던 농구선수 출신의 앨우드 브라운(1883~1924)이 제안했다. 필리핀과 더불어 독립국 중화민국·일본·태국, 영국 식민지였던 영국령 동아시아(현재 말레이시아)·홍콩이 참가했다. 2회 대회는 2년 뒤 중국 상하이에서 극동선수권대회(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로 이름이 바뀌어 열렸다. 그 뒤 필리핀-중국-일본을 돌며 34년 제10회 마닐라 대회까지 순조롭게 열렸다.

하지만, 34년 일본이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참가시키겠다고 고집하면서 중화민국이 탈퇴해 파행을 겪었다. 38년으로 예정됐던 11회 오사카 대회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무산되고 대회는 영영 사라졌다. 침략전쟁이 스포츠 대회를 망친 비극의 역사다. 이 때문에 48년 아시안게임 발기국들은 식민지와 침략국가가 상당수였던 극동선수권대회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아시안게임의 시대정신이다.

인천대회엔 2조5000억원이 투입됐다. 다음 대회를 유치한 베트남 하노이가 재정난을 이유로 지난 4월 개최권을 반납한 바람에 개최국을 다시 선정해야 한다. 한국도 70년 대회를 유치했으나 안보 상황을 이유로 반납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재원 마련을 위해 국가재정을 아끼려고 대회를 반납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66년 직전 대회를 열었던 방콕이 대신 치렀다. 한국과 중동 산유국들이 방콕에 재정 지원을 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2위를 차지했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