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울다 웃다 80年] 12. 여자의 순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 이기동.양정옥(右)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아리송해'(1979년작)의 한 장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김화자와 나, 둘만의 비밀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소문이 쫙 퍼졌다. 하나같이 김화자가 아깝다는 얘기였다. "화자가 눈이 삐었지. 어디 사내가 없어서 삼룡일…." "정말 남녀 사이는 모르겠구먼." "이봐 삼룡이, 자네 땡 잡았네 그려."

돌고 돌던 소문은 극단의 물주인 뚝건달에게도 들어갔다. 김화자의 미모에 반해 돈을 대던 그였다. 저녁 공연을 올리기 직전이었다. 극장을 찾은 뚝건달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았다. "소문이 사실이야? 김화자랑 그렇고 그렇다는 것 말이야." 말단 연구생이었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얘기가 있죠? 이 손 놓으시죠. 손 놓고 얘기합시다."

그 한마디에 뚝건달은 보따리를 쌌다. 남이 건드린 여자는 흥미가 없다는 투였다. 그런데 그냥 떠나지 않았다. 공연 수익금을 몽땅 찾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극단은 해체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여관비를 낼 돈도 없었다.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사흘이 흘렀다. 밤이었다. 단장은 김화자와 여배우 몇 명을 재촉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김화자는 술이 꽤 취해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막았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겁니까?"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새 물주를 찾았어요. 내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박살날 뻔한 단체가 살아난 거라고요." 단체에 돈을 대던 뚝건달이 도망친 게 자기 탓이니 새 물주를 찾는 것도 자기 책임이라고 했다. 그리고 새 물주 역시 자기에게 반했다고 했다.

"새 물주가 첫 상면을 축하하자며 술을 내겠다는데 거절할 수 있어요?" 주정을 부리다가 그는 내 가슴을 때렸다. 그리고 얼굴을 파묻었다. 가녀린 어깨가 들썩였다. "아세요? 여자의 순정은 남자보다 깊어요." 그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다른 여배우들이 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경북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마쳤다. 새 물주를 떼어 놓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단원들은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는 창 밖만 바라봤다. '이제 서울에 가면 단체는 해산할 텐데….' 김화자와도 헤어져야 할 판이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서울이 고향인 단원들은 집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서울에는 친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고향 춘천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건너편에 앉은 김화자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우린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겨울비가 세차게 차창을 때렸다. 기차가 서울역에 닿았다. 나는 짐을 챙겨서 내렸다. 김화자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나는 짐이었다. 버릴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는 짐 말이다. 김화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배씨, 우리집으로 가요."

코미디언 배삼룡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