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러TV·마이카시대 열어|공공시설 투자로 호황가속 -작득도 2토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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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건후 최대의 불황이 동경올림픽 다음해인 65년에 밀어닥쳤다. 일본특수강, 산양특수제강등 대기업체가 파산하고 산일, 대정등 대형종권회사가 정부의 긴급구제금융으로 연명했다. 65년 한해의 도산업체는 6천1백여개에 이르렀다. 경제성장률은64년의 18·3%에서 65년에는 10·5%로 떨어졌다.
올림픽의 뒤통수를 친 이같은 불황의 원인은 물가안정을 워한 정부의 긴축정책에도 원인이있지만 그보다 정부나 기업이 필요한 투자사업을 올림픽에 맞추어 앞당겨 실시했기 때문에 투자수요에 공백이 생긴 때문이었다.
○…올림픽후의 불황이겨내
65년의 불황은 정부의 공공투자사업의 재개, 중화학공업제품에 대한 수출수요의 증가로 66년부터 다시 고도섬장궤도에 진입할수 있었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의 플랜트수입2으로 한국도 일본의 경기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동경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국민들의 주머니사정과 생활양식에도 큰변화가 왔다.
올림픽을 앞두고 계속된 호황과「이께따」 (지건용인)내각의 소득배대정책으로 64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올럼픽개최가 결정된 59년의 두배가 넘는 1천4백14달러로늘었다.
이같은 소득증가를 배경으로 TV냉장고 전기세탁기등 이른바「3종곤기」 가 서민의 생활에 필수품으로 자리를 굳혔다. 기성복 인스턴트식품 맨션아파트가 의·식·주의 생활패턴을바꾸어 놓은것도 이때다.
뿐만아니라 올림픽에 맞추어 컬러TV가 방영되기 시각하고 값싼승용차 블루버드가 보급됨으로써 이대회를 계기로 일본에 컬러TV시대·마이카시대가 개막됐다.
일본정부가 8천8백78억엔을 들여 건설한 각종 공공투자 시설은그후 국민생활의 편익과 경제발건에 측량키 어려운 기여를하고 있다.
올림픽개최의 상징적인 사업으로3천8백억엔을 들여 건설한 신간선은 동경과 오오사까 (대판) 간 5백15km를 2시간 반만에 주파함으로써 거리감각을 바꾸어 놓았다.
64년 개통당시 동경과 대판만을연결하던 신간선 선로가 이제는 하까다(건다)까지 1천69km로연결됐으며 이용객도 개통당시 하루6만명에서 지금은 34만명으로 늘었다.
7백20억엔을 투입한 수도고속도로는 동경의 모습을 완건히 바꾸어 놓았을뿐 아니라 수도권교통난해소에 없어서는 안될 구실을 하고 있다.
0…시민에 친숙한 시설돼
동경올림픽 개최당시 4개노선만이 완공되었던 것이 지금은 8개노선으로 확대되어 동경시내를 글자그대로 사통팔달하고있으며 하루이용차량 댓수가 평균 80만대에 이른다.
지하철은 올림픽을 위해 도영1호(공사비5백49억엔) , 영단2호 5호선 (공사비5백 1천45억엔) 이 종실되었는데 노선마다 하루20만∼40만명의 동경시민을 태워나르는 시민의 발이 되고있다.
하녜따(우건)공항과 동경시내의 하마마쓰를 연결하는 모노레일도 역시 의국 참관객을 위해 98억엔을들여 건설한 것이다. 저음에는 값이 다소 비싸 시민들에게 외면당했으나 지금은 연간 1천9백만명이 이용하고 있다.
사회간접시설뿐 아니라 을림픽경기를 위해 건설된 각종 시설도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다.
동경 신쥬꾸(신숙)구에 있는메인스타디옴은 58년 3회 아시아경기대희를 위해 구명치곤궁경 가장자리에 건설했던 육상경기장을 동경올림픽때 다시 11억7천8백만엔을들여 확층, 정비했다. 대지 2만1천평에 연건평 l만2건평 규모.
지금도 국립경기장으로 연간 90게임 이상의 육상· 축구경기가 이곳서 거행된다.
같은 신쥬꾸의 요요끼(대대목)에 31억1천만엔을 들여 새로 건설한 연건평 6천2백38평 규모의실내종합정기장은 국제수준의 수영장·다이빙대·농구경기강올갖추고있는데 지금은 일반 시민에 개방되어 연간 25만명이 이용하고 있다.
유도·검도·궁도등 각종 무도의보급과 올립픽 유도경기를 위해 22억엔을 들여 새로 지은일본무도관은 무술도장으로도 쓰이지만 그보다 음악회·TV공개방송등을 위한 무대로 보다자주 활용된다. 연간 2백50만명이 이곳올 드나들정도로 시민과 친숙한 시설이 되고있다.
○…정부·재계서 적극지원
그밖에 사격강·축구장등 대부분의 시설이 그대로 남아 국민의 체력종진을 위해 요긴하게 쓰이고있으나 선수촌만은 사정이 다르다.
동경올림픽선수촌은 요요끼의 미군아파트를 인수해 그대로 사용했는데 2백49동의 목조건물은 대희를 치른후 모두 헐어 공원부지에 편입됐다.
다만 철근큰극리트로 지은 4층짜리건물 (대회당시 프레스센터)과 아파트14동만이 그대로 남아 스포츠연수원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숙사로 쓰이고 있다.
「다께따」 IOC위원은 『동경대회를치르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재정문제였으나 정부와재계의 적극지원으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을뿐 아니라 그때의 시설이 지금도 일본국민의 체육향샹에 크게기여하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하루빨리 준비를 서둘러야하며 온국민이 열치단결하여 적극 성윈하는자세가 필요하다』 고 했다.
【동경=신성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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