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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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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느 외국인은 서울의 인상을 바그다드와 같다고 했다. 찬사가 아니다. 사환의 도시같다는 얘기다.
요즘 서울 도심의 가로수들을 보면 모처럼 경색이 짙다. 회색의 빌딩숲 속에서 노랗게 채색된 은행나무들은 사뭇 정감을 돋운다. 서울에도 저런 서정적인 표정이 있었나 싶다. 초동의 은행나무는 역시 아름답다.
서울의 가로수는 전부 14만6천4백여그루다. 그대부분은 플라타너스(40%)와 버드나무(26%)다.
정작 은행나무는 도심과 관청가 주변에서나 볼 수 있다. 이들의 숫자는 2만여그루로 전체 가로수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벌써부터 가로수의 종류를 은행나무로 바꾸었으면 아마 지금쯤은 서울의 정경도 볼만했을 것이다. 한폭의 크레용 그림같은 정경을 보여주었을 것같다.
가로수로는 은행나무가 제격이다. 모양도 정갈하지만 생리도 꼭 맞는다. 은행나무는 지팡리를 꽂아놓아도 뿌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는가.
경기도 용문사엔 정말 그런 고사를 가진 명목이 있다. 지금은 둘레 4m에 높이가 45m가 되는 거목이 되었지만, 이 나무는 천년 남짓전에 마의태자가 금강여행을 떠나며 꽂아놓은 은행목 지팡이였다고 한다.
식물학자들은 단일종으로 유일하게 오래된 나무가 은행목이라고 한다. 화석의 흔적으로는 1억년도 넘는다는 것이다.
오늘 인류의 에너지원이 되고 있는 석유도 실은 빙하시대에 묻혔던 은행목이 탄화한 것이라고 한다.
「은행」이란 이름은 한자 그대로 은빛의 살구. 영어로도 똑같은 「실버.에이프리코트」다.
그러나 영국사람들은 「메이든.헤어.트리」라는 말에 더 친숙하다. 「소녀의 금발」이라는 뜻이다. 요즘의 화사한 은행나무 잎사귀를 보면 정말 그런 인상도 준다. 서양에선 우리와는 달리 잎사귀만 있는 수은행나무를 특히 좋아한다.
이 나무는 서양은 물론 중국.일본, 우리나라에 번져있다. 동경과 같은 도시는 은행나무를 아예 심벌로 삼았다. 여기엔 연유가 있다. 관동 대지진때 은행나무만은 화재를 견디어 냈다. 방화목으로도 좋다는 것이다. 용문사의 은행목도 정미의병때 왜병들이 부을 질렀지만 꿋꿋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플라타너스나 버드나무와는 달리 은행나무엔 벌레가 붙지 않는것도 인상적이다. 그것은 잎사귀에 「플라보노이드」라는 살충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 박석고개에 심어놓은 은행나무를 보면 대기오염에도 약하지 않다.
우리선인들은 은행목으로 가구며 조각도 했다. 결이고운 탓이다.
서울시는 올림픽을 대비해, 시민식수운동을 서두르고 있다. 이번 기회에 나무를 무턱대고 심기만할 것이 아니라 수종을 잘 선별해 기?도 있고, 쓸모도 많으며, 경색도 좋은 가로수를 심어야할 것이다. 은행나무는 바로 그 점에선 흠잡을 데가 없다.
그리고 외국처럼 뿌리를 보호하는 덮개까지도 마련하면 아마 서울의 인상은 몰라보게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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