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김해군 진영읍 부곡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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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단단하면서도 떫은맛이 전혀 없고 시원한 단맛이 야생감과는 비교가 안되지요. 해방전에는 부자가 아니면 맛보기 힘들다고「부자감」이라고 불렀답니다.』
경남 김해군 진영읍은 우리나라 단감의 시배지이자 90%이상의 생산지다.
진영읍내에서도 부곡마을은 2백여 가구중 30가구가 과수원을 갖고 있어 단감 마을로 불리고 있다. 마을 뒤편을 감싸고 있는 야산 전체가 감나무 밭으로 제주도의 밀감밭과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1∼2그루씩의 감나무를 마당 한구석에 갖고있어 단감나무에 묻힌 마을이다.
『단감은 섬유질이 적어 많이 먹어도 일반감처럼 변비를 일으키는 일이 없어요. 비타민C가 사과보다 훨씬 많아 미용이나 감기 예방에 효과가 큽니다. 또 천연 과당으로 피로를 빨리 회복시켜 준다고도 합니다.』
진영 단감 농업협동조합장 이성병씨(54)의 자랑이다.
단감은 본래 일본이 주산지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7년께다.
단감을 전공한 일본인식의물학자 3명이 합동으로 한국에서의 재배 가능성을 조사하다 진영읍의 지질·기후·풍토가 가장 알맞다며 부곡마을에 l백 그루의 묘목을 심기 시작했던 것.
이때부터 일본인과 공동으로 생산해오다 해방으로 물려받으면서 경제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옆 마을인 여내리 등으로 퍼지면서 읍 전체의 야산은 감밭으로 바뀌게 됐다.
『단감은 일반감과 달리 푸른색으로 덜 익었을 때도 떫은 맛은 전혀 안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양력 7월 하순이면 단맛이 나기 시작해 동네아이들이 오고 가며 따먹기도 합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인접군과 전라도·충청도 등 다른 지방에서도 단감 묘목을 옮겨 심어 재배를 시도했지만 성공한 곳은 거의 없다.
야산이 모두 북향산으로 봄·여름의 풍해를 막아주고 토질이 밤자갈이 섞인 사질황토로 수분 보유에 알맞기 때문이라는 게 농협측의 설명이지만 아직 학술적인 조사를 해보지는 않았다는 것.
단감은 1월부터 수확기인 10월까지 매월 거르지 않고 비료주기·농약살포·풀뽑기·가지자르기 등을 해줘야 한다. 일반 감나무처럼 방치해두면 밤알만한 감이 열렸다가 곧 떨어져버려 전혀 수확을 거둘 수가 없다.
값도 물론 일반감과는 비교가 안된다. 산지에서 1개의 값이 1백50∼3백원씩으로 최고품 사과의 3배 가까운 값이다. 접목후 3∼4년후부터 결실이 시작되어 10년이 넘으면 그루당 5백개쯤의 감을 딸 수 있고 일본에서는 수령 2백년 이상 수확을 하고 있다고 했다.
『논농사는 식량으로 쓰고 학비·생활비는 감나무로 벌지요. 잔손질이 많기는 하지만 다른 유실수보다 소득이 많은 편이지요.』
부곡마을 김용립씨(65)는 3백그루의 감나무로 3남매를 다 키워냈다고 대견한 표정이다.
그루당 순소득은 4만원쯤으로 1천5백평의 논농사보다 훨씬 낫다고 설명했다.
여내리의 김상한씨(59)는 몇만 그루를 가진 「부자」로 매년 동남아에 수출해 오고 있다.
김씨가 생산하는 단감만도 1년에 2만상자쯤으로 거의 다 서울로 팔려나간다.
산지값이 60∼1백개들이 15㎏ 상자당 1만5천∼2만원.
수출 가격은 운반비 등이 비싸 국내 가격보다 더 받고 있다.
단감 덕분에 이 마을엔 가난한 사람이 별로 없다. 단감나무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1년내내 잔손질이 끊이지 않아 남정네는 7천∼8천원, 부녀자는 4천원씩의 일당으로 일거리가 남아돈다. 이 때문에 집집마다 서울·부산 등지에「유학생」자녀를 두고 있을 정도다.
단감 마을의 걱정은 성수기인 10월 한달동안의 「홍수출하」로 값이 떨어지는 것. 73년부터 농협에서 보관 창고를 짓고 3개월쯤 보관하고 있으나 자칫하면 썩어 고민거리다. 단감은 수확기를 넘기면 홍시가 되지 않고 썩어 버린다. 그래서 가을 수확기에 접어들면「입도선매」식으로 서울의 과일상인들에게 감을 따지도 않고 과수원체로 팔아버리는 일도 73년전부터 성행하고 있다.
또 5∼6년전부터는 도시의 부자들이 큰 자본으로 야산 전체를 사들여 몇만그루씩 대규모로 재배하는 곳이 늘어 맛과 값을 떨어뜨리고 인심을 사납게 하는 것도 불만중의 하나다.『3대째 단감과 함께 살지요. 대대로 자손들을 지켜줄 나무로 생각하고 아침저녁으로 돌봐주고 있습니다.』
10년째 농협조합장직을 맡고 있는 이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감나무 농장이 앞으로 2백년은 집안을 먹여 살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진영=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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