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영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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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런던에 사는 한 한국부인은 어느날 아침 영어학원에 가기 위해 나갔다가 버스가 30분이나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콜택시를 부르려했다. 그러나 부근에는 공중전화가 없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옆에 있는 경찰관 파출소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콜택시 한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경찰관은 『여기서 학원까지는 멀어서 콜택시를 타면 요금이 아주 비쌉니다. 내가 대신 태워다 드리지요』 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경찰차에 이 부인을 태워 학원까지 데려다 주었다.

<일상불편한 일도 도와>
영국 경찰관들이 이 친구처럼 모두 친절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늘 일어나게 마련인 불편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영국경찰관의 일반적 태도의 한 예임에는 틀림없다.
흔히 있는 예로 열쇠를 차안에 둔 채 차문을 밖에서 잠가버린 경우 경찰관을 불러 차문을 열게 한다. 낯선 개가 집 주위를 서성거릴 때도 경찰관을 불러 데려가게 한다. 이 밖에도 휴일 같은때 범죄와 관계없는 불의의 문제가 일어날때 경찰에 요청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데까지 도와준다.
이와 같은 영국경찰의 대민관계는 시민의 환심을 얻어야만 범죄예방과 범죄수사등 경찰본연의 임무를 수행합에 있어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수 있다는 오랜 전통에서 키워진 것이다.
런던경시청에는 28대의 전화가 대민전용으로 하루 24시간 열려 있다. 이 전화를 통해 들어오는 시민들의 신고·협조요청·정보제공의 건수는 1년에 1백만건이나 된다. 아무도 보지않는 곳에서 경미한 교통사고를 내고 현장을 떠났던 한 외국인은 두달후 경찰의 방문을 받고 혼비백산한 일이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은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현장을 보고 경찰에 알렸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야드가 범죄수사 면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시민들의 이런 일상적 협조에 큰 힘을 입은 덕분이다.
영국사람들이 「보비」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경찰은 시민들로부터 상당히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80년 3월 선데이 타임즈지는 여러 직종에 대한 시민들의 존경도를 조사한적이 있다.

<변호사·의원 보다 신뢰>
『귀하는 다음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정직성과 윤리적 기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경찰의 정직성과 윤리기준이 높다고 답변한 사람은 51%나 되었다.
이는 의사의 73%보다는 낮지만 변호사(49%) 보다 높고 국회의원(17%)과 기업인(17%) 보다는 월등히 높다.
런던경찰이 창설된 것은 웰링턴장군이 수상이 된 이듬해인 1829년이었다. 그때까지 있으나마나한 야경꾼들에만 시민의 치안을 의존했던 런던시민들은 정부관장하에 조직된 경찰이 범죄예방 보다 시민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푸른 제복을 입은 악마」(경찰)가 시민들을 괴롭힐 것에 대비해서 몽둥이가 필요한 시민에게 몽둥이를 제공합니다』라는 팸플릿이 곳곳에 뿌려지고 시민들에게 폭행하는 경찰의 만화도 성행했다.
이같은 반대에 부닥쳐 런던경시청은 경찰에 대한 신뢰를 얻는 길은 대민봉사의 이미지를확립하는데 있다고 믿고 엄격한 자체기강을 세웠다.
우선 제복을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 복장과 비슷한 점잖은 것으로 정하고 군복과 비슷한 면모를 모두 제거했다.
시민의 모범이 되게 하기 위해 자체기강도 확립했다. 경찰이 창설된 후 처음 9년동안 5천명이 「근무중 음주」와 기타 사소한 탈선행위로 해임된 것을 보면 그때의 자체기강이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해서 수립된 민주 경찰의 전통은 경찰은 민중의 친구라는 이미지를 심었고 「악마」로 불리던 경찰은 시민의 사랑을 받게 됐다.
지금도 영국경찰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아야 된다는 행동원칙이다. 영국경찰관은 40cm 길이의 곤봉을 갖고 다니지만 바지 주머니 옆에 구멍을 뚫어 감추고 다닌다. 범죄율이 높아지면서 특수임무를 띤 경찰관은 권총을 소지하지만 역시 일반시민의 눈에 띄지 않게 바지주머니 속에 감추고 다닌다.
경잘서의 표지도 단지 『경찰』이라고 쓴 파란색 풍선등만 건물 앞에 보기 쉬운 곳에 세워놓아서 마치 병원처럼 사람들이 기피하기 보다는 도움이 필요할 때 찾는 곳이라는 친근감을 풍기고 있다.

<피의자란 말도 안써>
피의자를 수배할 때 경찰은 『××사건과 관련해서 이러이러한 사람과 인터뷰를 원합니다』라고 발표한다. 또 피의자가 검거됐을 때는 『××사건 해결을 위해 아무개가 경찰을 도와주고 있다』 고 발표한다.
범인이라든가 심지어는 피의자란 용어까지도 경찰은 사용하지 않는다. 유죄판결이 날때까지는 모든 피의자는 무죄로 간주한다는 교과서적 수칙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지키자니 경찰로서는 희생도 따른다. 지난여름 전국대도시에서 2주일동안 격렬한 실업폭동이 일어났을 때 수천명의 경찰관이 부상했다. 그러나 시민피해는 사망자 단 한사람에 그쳤다.
그 결과 영국경찰은 아직도 서구에서 가장 점잖은 경찰이란 전통이 재확인됐다,
영국 경찰관(순경)의 봉급은 월1천2백달러(80만원)정도로, 국민학교 교사 보다는 조금 적고 철도원·소방서원 보다는 약간 많은 액수다. 수사비는 일당으로 일괄해서 주지 않고 선비로 지급하며 시간외 근무수당이 나온다. 그래서 실제 봉급은 본봉보다 20∼30% 더 많다.
물론 영국경찰관이 모두 천사들만은 아니다. 특히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이나 흑인 또는 동양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 경찰이 인종차별적 행동을 취하거나 난폭하게 피의자를 취급하는 경우가 가끔 문제가 된다. 최근에는 정신병자가 된 한 왕년의 권투선수가 7명의 경찰관에 타살된 사건이 물의를 빚고 있다.

<도보순찰로.친숙 꾀해>
또 지난 10년 동안 경찰에 억류돼 있는 동안 사망한 피의자수가 2백45명인데 이중 66명만이 자연사이고 나머지는 사인이 확실치 않다는 통계가 나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의가 복잡해지고 범죄가 늘어 남에 따라 영국경찰이 누려온 좋은 인상도 약간씩 바뀌어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경찰 스스로는 물론 사회 각층에서 오랜 전통을 살리는 방안에 고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가지 개혁은 경찰의 기동화로 시민과 경찰관 사이의 인간관계가 소원해 졌다는 판단 아래 요즈음 자동차 순찰보다 보도순찰하는 경찰관수를 대폭 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의존경과 신뢰를 얻는 길만이 범죄예방과 수사활동의 지름길이라는 철칙은 민주경찰의 황금율이라는 점을 영국인들은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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