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별보고 달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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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약자와 서민의 이익보호를 맡은 소명집단인 경찰­. 영과 욕의 굴절 속에 36년을 성장해온 국립경찰은 사상 유례없는 수사경찰관의 피살자 예금증서절취라는 사건으로 그 설 곳을 잃고 방황하는 것같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의 경찰을 보는 눈은 아직도 동정적이며 이 쇼크가 진정한 민주경찰의 면모를 갖추고 도약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두의 한마음이다.30주년 경찰의 날과 예금증서절취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실상과 허상을 시리즈로 엮어본다.
「쾅 쾅 쾅』누군가 숨가쁘게 대문을 두드렸다. 0시10분. 김운회경장 (40·청량리파출소) 은 15년간의 경찰생활에서 얻은 습관으로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밤11시30분까지 일제검문을 마치고 막 자리에 누운지 30분만이었다.
『비상! 주택밀집지역에 큰불이 났어.』
집관내인 전농파출소 박순경이 숨을 헐떡이며 의치는 귀에 익은 목소리.『제기랄 또 비상이야.』김경장은 천근같은 눈을 냉수로 깨우면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종종걸음으로 화재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인파정리및 차단경비를 지시 받았다.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잡은 세탁소에서 난 불은 세탁소 안의 인화물질로 기세 좋게 벌써 옆으로 4채째 번지고있었다.
가구를 하나라도 더 건지겠다고 주민들은 겁 없이 불꽃이 널름거리는 화재현장에 달려들었다.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제지하다보니 온몸에 땀이 흥건히 흐른다고 이 소란 통에 유리에 걸린 주민을 앰뷸런스에 업어 태우고 또다시 일려드는 인파를 밀어내다 보니 입이 마르고 단내가 확확 코를 찌른다.
새벽 3시. 진화작업이 끝났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간다. 잠시 토끼눈을 붙이고 나면 바로 근무처인 청량리파출소로 나가야하기 때문이다.
상오 8시30분 부석부석한 얼굴로 간밤에 철야 근무한 동료와 교대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화재현장 비상근무로 잠을 설쳤지만 순서에 따른 근무교대를 그런 이유로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상오 8시까지 소내 근무, 11시부터12시까지 관내 1호선 순찰, 하오 1시부터 2시까지 호구조사와 소재수사. 오늘 배당된 것도 6건이다. 또 다시 소내근무, 하오 5시부터는 제2호선 순찰이다. 하오 8시부터 1시간 동안은 노점상 단속및 우범지대 방범순찰. 저녁 9시부터 2시간 동안 순찰1, 2호선을 다시 돌고 나면 하루중 가장 골치 아픈 소내 근무시간이다.
취적·무전취식자·윤락행위자·싸움꾼·통금위반자 등 새벽1시까지 파출소 안은 시끌시끌 하다.
하오 11시50분, 대낮부터 술에 취해 엉겨붙은 싸움꾼 2명을 연행했다. 파출소 기물을 부수고 머리를 벽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된 채 김경장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멱살잡은 손을 뿌리쳐 한쪽구석에 몰아붙이자 『경찰관이 시민 친다』며 고래고래 악을 쓴다. 이 소동에 단추와 견장이 떨어져나갔다. 김경장의 손등에도 손톱 긁힌 상처가 생겼다.
북새통에 날자가 바뀌어 이튿날 새벽 1시. 방범대원과 함께 새벽3시까지 관내 방범순찰, 새벽4시부터는 조조 검문.
날이 훤히 밝아오는 6시부터 1시간 동안이 24시간 근무중 유일한 휴식시간이다. 상오 7시부터는 또 교통정리보조를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루 24시간중 23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우는게 전국 지·파출소근무 경찰관들의 근무실정이다.
서울 노량진경찰서 봉천파출소의 경우 직원 13명이 1명당 주민 6천여명을 맡고 있어 격일근무는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비번인 날에도 본서지원근무·일제검문·특수지근무·요인경호근무 등으로 제대로 집에서 쉴수 있는 날은 1주일에 이틀 정도. 별을 보고 나왔다가 달을 보고 귀가하는 일과.
이래서 경찰관들은 아들·딸들에게 얼굴조차 익히기 힘들다. 아내에게도 면목 없다. 언제나 짜증스럽고 피곤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호소한다.
한때「빽」좋은 사람만 갈수 있다고 부러움을 샀던「교통경찰관」은 이제「고통경찰관」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서대문경찰서 교통계 K모순경은 매일 상오 6시에 집을 나와 밤11시30분까지 17시간30분이 정상근무 시간이다. 그외에 1주일에 한번씩 야간근무를 하는 날은 통금5분전까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카빈을 멘채 바리케이드 앞에 선다.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근무. 요즘만해도 새벽 냉기가 뼈속까지 스며든다. 교대를 하고 나면 통금이 풀릴 때까지 인근파출소나 교통초소의자에 앉아 새우잠을 잔다.
그의 걱정은 이런 고통보다도 배기가스에 병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두통이 심해진통제를 매일 먹어야 한다. 밤이면 기침이 심하다고 했다.
이런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경찰관들의 대우는 전체수의 50%정도가 면세점 이하다. 그래서 이들은 흔히 자신들을 가리켜「면세점 이하 인생」이라고 한다.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계 A모경장 (40·8년 근무) 은 군경력 3년을 포함, 그가 받는 한달 봉급은 16만8천1백4원.
각종 공제금을 빼고 나면 실수령액은 16만9천8백54월이다. 중학교 2년, 국민교 5년생을 포함해 가족은 4식구.
다음은 A경장의 부인이 기록한 한달 가계부. 주부식및 연료비 12만원, 수도·전기요금등 각종 세금 2만원, 교육비 4만원, 병원·문화비 2만원, 방범비 1천5백원등 합계 20만1천5백원.
A경장 자신의 용돈은 일체 월급봉투에서 축을 내지 않는다지만 만성적인 적자가계다. 누적된 적자는 바로 인근 가게에 밀린 쌀값·연탄값이 되고 이를 보너스 달이면 갚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서울 광장동 연립주택에 전세 살고 있는 그는 요즘 집주인이 50만원을 더 올려 달라고 요구, 주인에게 아쉬운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서러운 생각이 들고 식구들에게 체면이 말이 아니다』고 한다.
일선경찰에서 지급되는 형사활동비는 하루 2천5백원. 이를 갖고 월46건씩 떨어지는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겠느냐고 형사들은 말한다.
최근 전국운수노조가 운수종사근로자를 상대로 16개 직종을 선정 조사한 직업선호도에 따르면 1위가 교수, 2위가 판검사, 3위 국회위원, 정비사 14위, 운전사 15위, 경찰관이 16위로 맨 끝이었다. 이는 운수종사자와 경찰관이라는 상대적 관계가 있겠지만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경찰이 최하위라는 것은 어쩌면 슬픈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임금에 의한 경제적 빈곤, 기계이상의 과중한 업무량, 경찰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우리경찰의 발전은 이들 문제부터 해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겠다. <고정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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