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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송」과 「비난」한몸에 모은 중동의 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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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일 군사퍼레이드를 참관하던중 무장병사들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안와르·사다트」이집트 대통령은 나일강 계곡의 궁벽한 농촌 출신에서 대통령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중동평화수립자로 세계인들의 칭송을 받은 한편 아랍국들로부더 아랍의 명분에 대한 반역자로 지탄을 받아왔다.
77년11월 근30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모색하기위해 단행했던 그의 역사적인 예루살렘방문은 48년의 이스라엘국가수립이후 아랍과 이스라엘정치인들간의 직접적인 첫공식시접촉이었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가 전재의 참상을 모면케하고 자신의 조국을 중세기적인 비참한 현실로부터 현대국가로 성장시키려는 진지한 꿈을안고 과감히 행동해온 지도자라고 찬양해왔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행동은 대다수의 아랍국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의 비판자들은 그가 국민들의 빵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요란한 정치활동으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서방의 돈지갑을 풀어놓게 하려던 평범한 행정수완을 지닌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공격해 왔다.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은「사다트」가 소박하면서도 빈틈없는 이집트농민의 상을 실현하여 전임자인 「가말·압델·낫세트」대통령치하에서 수세기동안 계속된 농노제도의 굴레를 벗기고 국가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인물로 평가하고있다.
『동질성의 추구』란 책에서 「사다트」대통령은 자신의 농촌경험으로부터 항상 힘을 얻어왔다고 강조하면서 이집트 국토를 제외하고는 어떤것을 걸고서도 이스라엘과 협상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바있다.
그는 또 이책에서 자신의 실용주의와 선천적인 보수주의, 그리고 족장적지도력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78년 「메나헴·베긴」이스라엘수상과 함께 공동수상한 l6만4천달러의 노벨평화상중 자신의 몫을 자신의 출생지인 「미트·아볼·쿰」에 기증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다트」대통령이 70년당시 아랍세계의 영웅이었던「낫세르」대통령의 자리를 이어 받았을 때만해도 그가 장기집권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낫세르」의 급서로 세계의 관심은 과연 조용조용한 말씨에 약골의 인상을 풍기는 「사다트」부통령이 좌우익간의 분열을 중화시킬수있는 후보가 될것이냐에 쏠렸었다.
그러나 73년10월 중동전쟁을 계기로 「사다트」대통령은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됐으며 예루살렘방문과 캠프데이비드 협정서명에 이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0월 중동전 초기의 이집트군의 승리는 군부와 국가에 새로운 확신을 불어넣었고 이를통해 「사다트」대통령은 국내의 비판세력들을 침묵시킬수 있었다. 이어 그는 정적들을 숙청하고 「낫세르」의 구체제를 대부분 해체시켰다.
72년초 「사다트」대통령은 소련군사요원 2만명전원을 추방시켰는데 이들은 「낫세르」가 67년 중동전매 이스라엘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후 불러들였던 병력들이었다. 「사다트」대통령은 또 75년6월 이스라엘군대가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기도 전에 수에즈운하를 재개하여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했다.
그의 이같은 행동은 이집트에 국제적인 호의를 불러왔는데 그는 아랍국들이 중동분쟁을 만족할만하게 해결하는데는 그같은 초치가 필요하다고 인식했었다. 이제까지 「사다트」대통령에게 문제거리로 제기된것은 그의 대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국내의 비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의 처절한 빈곤과 경제적 부진이었다. 그는 서방에대한 개방정책을 신봉, 상점들을 소비재들로 가득하게 했을뿐 공업생산이나 식량증산등 기본 문제는 별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지난9월2일과 3일에 걸쳐 단행된 국내비판세력 일체 검거에서 1천5백36명을 체포, 구금했다.
여당인 국민민주당 기관지 메이요에 따르면 구금된 인물중에는 전부수상 1명, 전각료 8명, 야당정치인 10명, 언론계인사 10명, 변호사 16명등이 포함되었다.
또 이집트의 독특한 기독교계인 콥트파의 주교 8명과 목사 16명도 구금자 명단에 끼여있다.
특히 「사다트」가 콥트교도를 탄압하면서 콥트교황인 「세누다」3세를 강제로 퇴위, 그를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간의 와디 나트로운에 있는 사막수도윈으로 추방시킨 것은 회교도들의 거센 반발을 붙러일으켰다.
그의 이같은 조치는 격심한 인플레와 더붙어 계속되는 경제난을 배경으로 나날이 증대되고 있는 비판세력의 싹을 일거에 도려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콥트파에 대한 탄압과 함께 된서리를 맞은 회교신도들의 집합체인 이슬람교 원리운동파의「이슬람협회」와 「이슬람동포단」등도 최근 「사다트」의 대이스라엘 평화협상을 강력히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졌었다.
「사다트」대통령은 또 지난 9월l5일 소련이 KGB를 통해 「사다트」정권전복음모를 기도했다고 발표하면서 이집트주재 소련대사등 외교관과 기술자들을 추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재신임을 얻기도 했다.
「사다트」대통령은 정치적이며 지성적인 언론인과 군인이 혼합된 인물이며 아랍어는 물론 영어와 독일어·폐르시아語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독실한 회교신자인 그는 자신의 이마 한복관에있는 갈색점이 하루 5번씩 메카를 향해 땅바닥에 엎드릴때 매트에닿아 생긴것이라고 농담을하는 여유도 있었다.
그는 영국인과의 혼혈인 부인 「지한」여사와 함께 카이로 호화저택에서 살아왔다.
그의 첫 결혼은 지난49년 이혼으로 끝났고 6명의 딸과 「가말」이라는 아들 1명을 두었다. 「사다트」대통령은 지난1918년 12월24일 가난한 문관인 아버지와 수단여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임관돼 52년 왕정전복때 「낫세르」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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