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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소인국 간 걸리버에게 매일 제공된 와인은 432리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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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25면

신생대의 거대 포유류들. 왼쪽부터 메가테리움, 스텝 매머드, 파라케라테리움, 데이노테리움, 엘라스모테리움. 이중 파라케라테리움은 지구 역사상 가장 큰 육상 포유류다. 코뿔소와 기린이 섞인 것 같은 모습 때문에 기린 코뿔소란 별명이 붙었다. 현재의 아프리카 코끼리 키는 파라케라테리움의 목 아래에 겨우 닿을 정도에 불과하다.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출판한 해는 1726년이다. 1726년이라고 하면 꽤 옛날인 것 같지만 만유인력을 수학적으로 풀어 천체의 운행을 계산한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3~1727년)이 죽기 바로 전 해다. 그러니까 과학혁명이 일어나 2000년 이상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천동설(天動說)에 이미 종지부를 찍고, 산업혁명을 코앞에 둔 시기였다는 말이다. 이런 시기에 스위프트는 소인국과 거인국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이 책은 동화가 아니다. 민중들의 삶에 무심한 채 권력투쟁만 일삼던 영국 정치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급격히 변한 과학계를 조롱한 풍자소설이다.

<15> 생명체 진화와 크기

작품 속 주인공인 레뮤엘 걸리버는 소인국 사람들보다 12배나 더 크다. 거인국 사람들은 걸리버보다 12배에 달하는 덩치들이다. 스위프트는 소인국 사람들이 하루에 약 0.25L(리터)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썼다. 그렇다면 걸리버에겐 하루에 몇 리터의 포도주를 제공해야 하는가? 스위프트는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계산했다. 키가 12배이면 부피는 12×12×12=1728배이므로 여기에 맞춰 소인국 사람들은 걸리버에게 매일 0.25×1728=432L의 포도주를 제공했다. 아마 걸리버가 이걸 다 마셨다면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식으로 계산하면 거인국에선 한 사람이 하루에 약 75만L, 1년이면 2700만L를 마시게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1년 포도주 수입량이 3000만L 정도다.

스위프트는 크기가 다르면 기능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소인국 사람들은 현미경 없이도 미생물을 볼 수 있다고 봤다. 작으니까 눈도 작을 것이고, 작은 눈으론 작은 것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인국 사람들은 망원경 없이도 멀리 있는 천체를 볼 수 있다는 식이다. 당연히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다.

소인국 사람도 현미경이 있어야 미생물을 볼 수 있고, 거인국 사람도 망원경이 있어야 멀리 있는 천체를 관찰할 수 있다. 천상의 물체와 지구 위에 있는 물체가 똑같이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크기와 상관없이 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양은 같지만 크기만 다른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 소인국·걸리버·거인국 같은 세 종류의 인류가 동시에 공존할 수는 없다. 크기가 달라지면 모양도 달라진다. 사람만큼 큰 개미나 개미처럼 작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를 통해 영국 정치계를 조롱하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계를 조롱하긴커녕 자신이 여전히 자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고백하고 만 셈이다.

신생대 시작 무렵엔 생쥐만했던 포유류
생명의 진화엔 두 가지 분명한 경향이 있다. 크게 그리고 복잡하게. 이 두 가지 경향은 사실 하나다. 커지면서 복잡해지고, 복잡해지려면 어쩔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다. 38억 년 전 최초로 등장한 후 33억 년 동안이나 ㎜(밀리미터) 단위 이하로 존재하던 생명이 5억 4300만 년 전 갑자기 ㎝(센티미터) 단위로 커졌다. 고생대를 지배하던 삼엽충은 작고 단순한 구조에서 점점 더 크고 복잡한 구조로 변했다. 중생대를 지배하던 공룡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신생대가 시작할 무렵 생쥐 크기에 불과했던 포유류들도 계속 몸집을 키웠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 육상 포유류는 파라케라테리움이란 일종의 코뿔소다. 이 코뿔소는 몸길이가 9m, 어깨 높이는 7m, 두개골 길이가 1.5m가 넘는다. 몸무게는 15~20t에 이르렀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의 아프리카 코끼리는 아주 왜소하다. 이 코뿔소는 머리가 땅에서 아주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무 꼭대기에 있는 어린잎을 먹었을 것이다. 코뿔소와 기린이 섞인 것 같은 모습 때문에 기린 코뿔소란 별명이 붙었다.

여기서 잠깐 지질시대를 점검하고 넘어가자. 지질시대는 크게 시생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구분된다.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뉜다.

그렇다면 제1기와 제2기는 어디로 갔을까? 진화론을 주창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은 1833년 지질시대를 지층의 특성에 따라 제1기~제4기로 분류했다. 1872년엔 지층에서 발견되는 동물 화석에 따라 지질시대를 다시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구분했다. 이때 제1기와 제2기는 각각 고생대와 중생대가 된 것이다.

신생대는 지질시대에서 6500만 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대다. 이 가운데 제3기가 6300만 년을 차지하고 제4기는 단 200만 년에 불과하다. 제3기엔 기후가 대체로 온난했고 조산운동이 활발했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넓어지고 태평양이 좁아지면서 대륙 배치가 현재와 비슷해졌다. 제3기는 다시 팔레오세→에오세→올리고세→마이오세→플리오세로 세분된다. 파라케라테리움이 살았던 시대는 신생대 제3기의 일부인 에오세 후기다.

생명체 몸집 커지면 세포 수 늘어나
형태가 바뀐다고 해서 크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크기가 변하려면 형태는 변해야 한다. 사람도 아기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변하는 사이에 형태가 변한다. 몸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나이 들면서 계속 줄어드는 것을 생각해 보라.

크기는 진화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이다. 크기가 변하면서 생명체는 전엔 없던 새로운 기관을 갖게 된다. 크기는 진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진화의 주체인 것이다. 자신의 크기에 맞는 구조와 기능을 갖춰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크기는 생명의 모든 특성을 결정한다. 첫째, 크기는 생물의 힘을 결정한다. 둘째, 신체의 표면적을 결정한다. 표면적은 산소와 음식 그리고 열의 출입을 담당하는 곳이다. 셋째, 크기는 세포의 분화, 즉 분업을 결정한다. 넷째, 물질대사, 수명, 이동속도를 결정한다. 다섯째, 크기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개체 수를 결정한다.

이런 다섯 가지 특징을 보이는 것은 개체가 아무리 커도 세포가 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덩치가 커져도 세포의 크기는 늘 같다. 세포는 염색체의 유전자를 운반할 정도론 커야 하지만 산소와 영양분이 확산할 수 있는 정도의 표면적/부피 비율은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작을 수밖에 없다. 생명체의 크기가 커진다는 것은 세포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세포는 그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기능을 갖게 된다. 해면동물에서 시작해 어류· 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에 이르는 진화 과정은 결국 세포의 종류가 늘어나는 과정이었다. 해면동물에선 몇 가지에 불과했던 세포 종류가 파충류에 이르면 150가지로 늘어난다. 사람은 220종의 세포들을 갖고 있다.

소인국과 걸리버 그리고 거인국 사람들의 크기는 12배씩 차이가 난다. 크기가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 모양과 기능이 같을 수는 없다. 세포의 종류도 분명하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버가 만난 소인국과 거인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어야 할까?

소인국 사람은 키 14㎝, 체중 500g 정도로 생쥐만한 크기여야 한다. 도요새처럼 가는 다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거인국 사람들은 키가 20m쯤 될 테고 무게가 13t은 나갈 테니 코끼리 다리를 가져야 한다. 고로 걸리버 여행기는 다시 써야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대한 대화』(1632년)에 실린 삽화. 동물의 무게가 증가하려면 단지 크기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기 달라지려면 형태가 달라져야
조너선 스위프트가 활약하던 당시엔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과학자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크기가 달라지려면 먼저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은 당시 지식인들에겐 상식이었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미 알려준 사실이다.

1632년 당시 68세였던 갈릴레이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기 위해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대한 대화』를 출판했다. 지동설을 지지하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자신을 상징하는 살비아티, 천동설을 지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상징하는 심플리치오, 그리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는 사그레도가 나흘간에 걸쳐서 토론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둘째 날에 크기와 형태의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

살비아티: “자연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나무는 만들지 않아. 아주 큰 나무는 자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지가 부러져 버리고 말 테지. 사람이나 말도 다른 변화 없이 키만 커지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정상적인 기능을 하기 위해선 키가 커질 때 구조도 바뀔 수밖에 없지. 키가 커질 때는 뼈의 굵기가 굵어지고 훨씬 더 단단해져야만 버틸 수 있어. 그러니 키가 커질 때는 괴물로 보일 정도로 많이 변해야 해.”

심플리치오: “그렇지만 고래처럼 크기만 커진 물고기도 있잖아?”

살비아티: “고래는 물속에 살기 때문에 뼈와 근육이 가벼워졌고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별로 필요가 없어서야.”

진화의 방향은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어찌해서 요즘엔 커다란 포유류들은 존재하지 않는가? 간단하다. 인류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종류의 거대 포유류가 인류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 아메리카 대륙에 인류가 진입한 시기는 약 1만 6000년 전이다. 아메리카엔 가축화할 만한 동물도 적었고 먹을 만한 식물도 거의 없었다.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순식간에 거대 포유류 몇 종을 남기곤 멸종시켰다. 어깨 높이가 2m, 양 뿔의 너비가 2~3m나 되는 큰 사슴 메갈로세로스는 40만 년 전부터 유럽에 살았다. 하지만 9500년 전에 사람에 의해 멸종됐다. 스텔러 바다소는 길이 7m 이상, 몸무게는 8~10t으로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더 컸다. 이들 역시 가죽과 고기를 노리는 인간의 욕심 탓에 1768년에 멸종했다. 지구 생명 다양성의 위기는 크기가 별로 크지 않은 인류가 최고 포식자 지위에 올랐다는 데서 시작했다.



이정모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박사는 아니다.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 역임. 『달력과 권력』 『바이블 사이언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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