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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한국 IT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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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0년대 초반은 한국 전자·IT산업의 ‘위대한 시기’였다. 거셌던 세계 반도체시장 구조조정에서 승자로 우뚝 섰고,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디지털 휴대전화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함으로써 드디어 휴대전화에 초소형 컴퓨터를 결합한 스마트폰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이로부터 스마트폰은 통화기능뿐 아니라 이 시대 문화와 소통의 중심에 서는 차원이 다른 게임의 장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1980년대부터 세계 전자산업 강국으로 군림했던 일본 업계가 지리멸렬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20세기 전자산업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소니는 2000년대 초반 해외공장 폐쇄를 시작으로 지금도 여전히 구조조정 중이다. 아날로그 시대 승자가 디지털 시대로의 산업전환기를 대비하지 못했던 후유증은 길고도 깊었다.

 한데 최근 한국 IT산업도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는 신호가 울린다. 과거 공격적 도전자였다면, 지금은 당시 일본처럼 수세에 몰린 형국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시장에서 1위 자리를 내주고 있다. 1분기 중국시장에서 샤오미(小米)에 1위를 내준 데 이어, 세계 저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중국 레노버에 판매량 1위 자리를 내준 것으로 최근 조사됐다. 세계 최초·최대의 기록도 이젠 중국 업체들이 깨기 시작했다. 최근 독일에서 열렸던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선 중국 업체 TCL이 세계 최대 곡면 초고화질 TV를 발표했다. 또 액정 대신 양자로 구성된 반도체 결정을 넣은 퀀텀닷 TV를 중국 업체가 국내 업체보다 앞서 발표했다. 중국 업체들이 추격자를 넘어 어느새 경쟁자의 자리로 치고 올라온 것이다.

 지금은 10여 년 전처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모하는 식의 혁신적 산업전환기가 아니다. 쟁점은 기술이 아닌 시장으로 옮겨갔다. 기술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한 시장을 놓고 군웅이 할거해 혼전(混戰)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동안 디테일한 기술 개발에서 승부를 냈던 IT시장으로선 새로운 도전이다. 춘추전국시대엔 전통적 강자(强者)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참신하고 기발한 발상, 적과 아군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적 협력과 경쟁 방식의 체득, 새 국면에 대한 집중력 등으로 승패가 갈린다.

 애플은 그동안 금기시했던 4.7~5.5인치대 스마트폰을 출시하며 한국 업체들이 장악한 대화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또 그동안 적대적이었던 안드로이드의 근거리 무선통신을 받아들여 새 모바일 결제 기능을 선보였다. 그들은 이미 경계를 넘는 필승전략을 짜고 있다. 소소한 기술 개발과 디자인으로 결판나는 상황이 아니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이젠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을 발상의 전환과 끈질긴 야성(野性)을 깨워야 할 때다. 업계가 ‘과거 승리의 경험을 새 국면에 적용하려 했다가는 실패한다’는 토인비의 경고를 기억해 시장전략을 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