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개화기 외세의 침입 싸고 척사파간에도 "참여" "순수"논쟁-당시의 논전 벌인 글 모은 정윤영의 『뇌변』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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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미수교 1백년을 맞아 개화와 수구라는 개항기 지식인의 두가지모습에 대한 재평가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수구를 대변하는 양반지식인들간에도 참여와 순수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밝히는 자료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지가 박영정씨(부산은행 근무)가 최근에 입수, 20일 공개한 한장 필사본 『뇌변』(25㎝×18㎝·82면)이 바로 그것. 이 책의 편자는 이조말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우화 정윤영이다.
뇌 문이라 함은 죽은 이의 공적을 기리고 슬퍼하는 주도문으로 이 책은 이조말의 거유인 전재 임헌회가 1876년 죽자 그에 대한 평가를 두고 후학들간에 논전을 벌인 글들을 모은 것이다.
논쟁을 주도한 사람은 임헌회와 같이 노론계열인 매산 홍직필(1776∼1852년)의 문인인 중암 김평묵과 임의 제자 간재 전우.
김평묵(1819∼1888년)은 개항기에 쇄국을 고집한 일군의 보수유학자인 척사위정파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기도하다. 그는 1881년 이만손과 함께 1만여명의 영남유생들을 이끌고 척화소롤 올린 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섬에 유배까지 당한 참여파의 기수. 이에 반해 간재 전우는 순수성리학자를 고집하며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마다하고 김평묵의 제자들인 유린석 유중교 송병선 등이 국토의 위기에 의병활동 또는 순국으로 나설 때에 계화도에 들어가 문인 양서에 힘썼다.
이같은 순수와 참여의 팽팽한 대결이 개인차원의 기질문제가 아니라 세계관과 시국관의 차이에서 비롯했음을 이번에 발견된 자료 『뇌변』은 잘 드러내 보여준다.
중암과 양재의 논쟁발단은 중암이 임헌회가 죽자 뇌문을 지어 보냈는데 임의 제자인 간재가 이를 마땅치 않다고 돌려보낸데서 비롯한다.
중암의 뇌문은 임을 사마광·호안국 등과 비교하여 똑같이 훌륭한 인물이라고 했는데, 간재는 그들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한때 벼슬살이에 나오거나 변절을 한 선비이므로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스승을 헐뜯는 것으로 판단하여 돌려보낸 것이다.(전우축 김중암 뇌서)
중암은 다시 뇌문을 지어 보냈으나 간재는 이룰 또 되돌려 보냈다. 이 책에는 이때 글 심부름을 하고 그 내막을 쓴 중암의 손자 김춘선의 글 등 37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논쟁은 두 문인사이에 계속되어 위 뇌문과 제문용 비롯, 이 문제를 논란한 편지·잡저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편저자는 간재와 같은 임헌회의 문인이었으나 참여론자인 중암의 편을 들어 순수론자인 간재의 잘못을 밝히기 위해 이들 글을 모은 것 같다.
이 책의 서지학상 가치는 개별문집에 전해지지 않는 글들이 논쟁을 초점으로 하여 수록되어 있는 점이다.
중암의 두편의 뇌문은 중암집에 제문으로 실려 있고, 간재의 글들은 간재집에 실려있으나 이일에 심부름했던 중암의 손자 김춘선의 김춘선 결임선생문과 김유안 재호항일기약은 중암의 후손(중암의 현손이요, 김춘선의 손자인 김유성씨의 증언) 집에도 없는 글로 알려진다. 이밖에 서정순흥신두선서 이승욱여서정순서 이국헌일기약 장기환문견록 김정두록 등 20여 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논쟁이 흔히 인신공격으로 번져 가는 경우를 보지만 중암-간재의 논쟁도 마찬가지다. 김정두집에는 간재가 족보를 거짓으로 만들어 조상이 벼슬을 한 것처럼 조작했다며 인신공격까지 하고 있는데 실제 간재는 상인 출신으로 이조의 혜택을 받지 않았으므로 의병 등 구국운동에는 참여치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외세의 위협 앞에 개항기 지식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해서는 개화파와 척사파의 2분 법으로 연구되어 온게 현재까지 학계의 연구경향이나 척사파 안에서도 이처럼 순수와 참여의 시비가 엇갈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조명이 가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 이에 대해 척사파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이리화씨(사학자)는 『한말 개화기의 중요한 유학사적자료일 뿐 아니라 척사위정 및 의병사의 방계자료가 될 것』이라고 반가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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