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한국 징의 본고장 「함양 징」|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불이 나도, 잔치가 벌어져도 우리네 마을에 징은 울렸다. 농악·당굿·줄다리기에 흥을 돋우는 악기로서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을 불러모으는 신호용으로도 징은 울렸다.
대소 궂은 일,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울어온 징, 징은 우리 민족의 유습이요 향속으로 기나긴 여운만큼이나 한국인의 체취가 담겨있는 정겨운 풍물이다.
전국 곳곳에서 올리고있는 징 가운데서도 함양 징은 징의 대명사격으로 통한다. 대구·김천·거창의 징이 모두 함양에서 흘러나간 솜씨들이다.
5·16혁명 후 국가 재건이라는 구호의 물결 속에 각종 놀이에 풍물 사용을 금지하자 징의 수요도 급격히 줄어 함양 징도 그 맥이 끊기는 듯했다.
특히 3년 전 40여년간 함양 징의 울음을 빚어냈던 장인 오덕수씨가 세상을 떠나자 징 점엔 정적이 깃 들었다.
그러나 서울 직장을 던져버리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징메를 잡은 함양 징의 마지막 주자 오규봉씨 (28)가 꺼져있던 화덕에 불을 지핌으로써 징 소리는 다시 울려 퍼지게 되었다.
함양에서 안의를 거쳐 전북장수로 통하는 국토포장길로 20여분. 경남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외딴 골짜기가 바로 함양 징 전통의 현장이다.
『한때는 함양읍이나 안의에 만도 10여 군데 징 공장이 있었는기라예. 지금은 다 없어지고 우리집 뿐인기라예. 김천·대구 징 점도 기술자가 없어 문을 닫았다 카는데….』.
오씨는 기계로 뽑는 징 공장은·있어도 손으로 두드려 만드는 징 점은 이제 전국에 서너군데 뿐이라고 한다.
『소리는 물 따라 간다고 하데예.』 그래서 예부터 징 점은 산이 깊고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명산의 세 골짜기 물이 합치는 곳이라야 좋은 징이 나온다고 했단다.
바로 오씨네 징점은 덕유산 백운산 지리산의 세 끝에서 내려오는 물이 함께 만나는 곳에 있다. 이 마을 전설로 전해오는 명당 「꽃 뿌리 땅」이 또한 오씨네 장점.
징 하나 만드는데 20여 과정을 거치며 사용하는 집게만도 20종류에 메와 망치가 15종류.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방짜쇠를 도가니에 넣어 녹인다. 쇠가 녹으면 쇳물을 「물돌」로 틀에 부어 굳힌 「바디기」가 나온다. 「물돌」은 지리산에서 나는 특수한 돌로 이 돌이 아닌 곳에 쇳물을 부으면 쇳물이 꿇으면서 거품이 일어 못쓰게 된다.
활활 타오르는 조개탄 위에서 대정(대장장이의 우두머리)은 빈대떡 만한 「바디기」를 집게로 집어 쇠판 위에 올려놓는다.
3명의 「심메」「전메」「앞메」꾼들이 박자에 맞춰 대정이 들려주는 바디기를 두드린다. 이를 「도듬질」이라고 한다. 『도듬질은 밤11시부터 새 벽4시까지 밖에 몬합니더. 쇠를 달가서 빛깔을 봐감서 치는데 낮에는 빛깔을 똑똑히 알 수가 없거던예.
바디기 빛깔이 붉으모 덜 달가진 거라서 메질이 안되고 횐 빛깔이머 너무 달가진기라 때리면 쇳물이 팁니더. 똑발가 족족한 분홍빛이라야 하는기라예.』대정 서영옥씨(42)의 말이다. 두툼한 바디기는 차츰 펴지면서 직경 30㎝가량의 쇠판이 된다. 「초바디기」다.
집게로 한쪽을 잡고 달구면서 이번엔 가장자리를 품망치로 오그린다. 징과 형태가 비슷한 「이가리」다.
「이가리」를 다시 불에 넣어 달구어 중망치로 두들겨 울퉁불퉁하던 바닥살을 반반하고 얇게 편다. 이렇게 하는 것을 『풋 울음을 낸다』고 한다.
풋 울음을 낸 징은 놋그릇 깎는 것과 같은 기계에 대고 「상사」가 지도록 깎는다. 상사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줄이 쳐진 것으로 모양일 뿐 소리와는 관계가 없다.
징의 굽은 부분에 구멍을 내 끈을 매면 일단 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다시 「재 울음」을 잡아야한다.
전 공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건 쇳덩이에 저마다의 목소리를 넣어주는 울음잡는 일이다.『징이고 꽹과리고 울음이 목심인 기라예. 아직도 아버지 솜씨는 못따라가지예.』
징의 울음이 구성지고 길어야함은 물론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울음의 끝이 올라가는 것이다. 함양 징의 소리는 우람하면서 청명하고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져 파문이 퍼져나가듯 멀리 멀리 울리는 게 특징이다.
함양 징점에선 징과 꽹과리·동발을 만든다. 징은 지름이 한자여섯치쯤인 대징과 한자세치쯤인 보통 징, 아홉치쯤의 광쇠 곧 무당 징으로 나뉜다. 매구라고도 불리는 꽹과리는 지름이 일곱치쯤이고 두께에 따라 암놈 수놈으로 나뉘는데 두꺼운 게 암놈, 수놈은 얇으며 반드시 암수 한쌍이 되어 쓰인다.
이 마을의 징장인은 통틀어 6명. 모두가 세상 떠난 오덕수씨 밑에서 솜씨를 익힌 토박이들이다. 주로 농한기를 택해 1년이면 작업일수가 1백일. 연간 1천여점을 뽑아낸다. 울음잡이의 일당이 1만원, 다른 장인들은 7천원으로 하루 농사품 4천원에 비하면 높은 공임이다. 주로 주문생산에 의존, 징 1개에 3만원씩에 낸다. 수입해서 쓰는 주석 원가 자꾸 오르는 데다 기계징의 덤핑 때문에 큰 걱정이라고 오씨는 말한다.
마이크와 스피커 전자악기에 밀려 호흡이 가빠져만 간다는 그는 그래도 노인보다 젊은이 특히 대학생들이 함양 징을 인정하고 찾아주는데 희망을 걸고 있다고 한다.
『꽝-』은근과 끈기의 상징 같은 징 울음. 목을 쭉 뺀 황소의 울음처럼 징 소리는 산줄기를 넘고 넘어 끊일 듯 이어져 퍼져간다.<함양=고정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