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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백팔염주를 만드는 모감주나무 군락지-서산군 안면읍 승언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관상수나 용재림은 물론 땔감으로도 못 쓸 나무』-.모감주나무를 내 몸처럼 아끼며 가꾸는 마을이 있다.
바닷가 모래밭에 5백여 그루가 군락(군락)을 이루며 푸르름을 자랑하는 충남 서산군 안면읍 승언리 8구 방포(젖개)해안마을.
이 마을에 모감주나무가 뿌리내린 것은 중국 산동지방에 자생하던 나무의 씨앗이 해류를 타고 황해를 건너 이곳에 표착했을 것이라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어군을 쫓아 한반도 서해안까지 왔던 중국어부들이 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잎은 계란모양의 긴 타원형. 7월에 노란 꽃을 피워 10월이 되면 콩알만한 크기의 까만 열매가 땅에 떨어진다.
열매는 땅에서 자연히 건조되면서 양쪽으로 구멍이 뚫려 예로부터 염주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모감주나무의 별칭이 염주나무.
보리수 열매인 보리자, 금강자(금강자)나무 열매인 금강주가 염주를 꿰는데 쓰이고있으나 모감주로 만든 염주는 큰(대덕) 스님들만 지닐 만큼 귀한 염주재료로 알려져 있다.
원래 염주는 영락(영락)으로 몸을 치장하는 습관이 있는 인도에서 브라만 교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불경에는 목수자경에 목수자 열매 1백 8알로 만든 염주가 나온다.
이 염주가 오늘날의 것으로 자리잡은 것은 6세기께 중국 당조 담만(담란)이란 점토종(점토종)의 고승이 하루에 3만 번씩 아미타불을 외었는데 3만 번을 틀리지 않고 외기 위해 목간자(목간자=나무 동아리)를 꿰어 염주를 만들어 횟수를 세는 데서 유래했던 것.
후대로 내려오면서 염주는 단순히 염불의 횟수세기 뿐만 아니라 인간의 백팔번뇌(백팔번뇌)를 상징하여 1백 8알의 구슬로 정착되었다.
불교가 번성하면서 옥(옥)이나 수정·비취·산호 등으로까지 만들어 멋을 부렸다.
따라서 염불의 횟수를 세거나 백팔번뇌를 의미하거나 간에 염주 구술의 재료는 아무런 뜻을 갖지 못하는 것.
뒤에 불교가 세속에 널리 피지면서 일반 대중이 지니기에 편하게 54∼14알의 구슬로 된 단주(단주)가 등장했다.
하지만 모감주나무 열매는 일명 목수자. 목수자경에서도 보듯이 본래 염주는 염주나무나 기타 다른 것보다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것이 읍장 박윤수씨(53)의 설명이다.
『우리마을의 모감주나무열매로 염주를 꿰었다는 스님은 기록에 없지만 숱한 종사(종사)들이 서해 안면의 모감주 염주를 애장했다는 이야기는 전합니다. 주민 곽 춘씨(52) 는 우리 나라의 불교전래 루트인 백제불교의 첫 기항지가 안면도라는 점과 이 마을의 염주나무와는 너무나 걸 맞는 일이라고 말한다.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처음 도착한 곳이 안면도라는 추정도 있다.
이설의 주장은 젖개 주민들이 50년 전 만해도 이곳 앞 바다에서 중국어선들이 고기를 잡았듯이 중국에서 건너오면 가장 손쉬운 도착지가 이곳이라는 것.
이 일부주장은 백제의 불교는 안면도에서 해미·천안을 거쳐 광나루에서 당시의 백제임금 침류왕에게 전래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모감주나무 숲은 군의 보호림으로 나무든 열매든 벌채가 안 된다. 읍장 박씨의 설명은 1년이면 수십 가마의 열매가 떨어지지만 당국의 허가가 없어 수확을 못한다고 한다.
고승의 사리를 연상케 하는 염주열매는 속세의 범접을 거부한 채 해마다 소복이 쌓이고 있다. <서산=전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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