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5<)제74화>한미 외교 요람기(21)-트루먼 대통령 면담|한표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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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 대표와 「트리그브·리」 유엔 사무총장의 적극적인 로비, 소련 대표 「말리크」의 불참 덕분에 장면 대사는 6월25일(일) 열린 유엔 긴급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피침 당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장 대사는 내가 준비해준 성명 문을 읽었는데 그 핵심은 『북한 괴뢰의 우리에 대한 침공은 인류에 대한 죄악』(Unprovoked attack by communist puppet regime is a crime against humanity)이라는 것이었다.
장 대사는 또 『한국 정부 수립에 유엔이 큰 역할을 했는데 평화유지에 대한 기본책임을 지닌 안보리가 북괴의 침략을 적극 저지하는 것은 급한 의무』 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장 대사가 군사 원조를 직접 요구하지는 않았다.
장 대사의 발언 후 「숀」 영국 대표가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보충발언을 했고 이어 미국 측이 제의한 결의안이 9대 0으로 채택되었다. 참석자중 유고 대표만이 기권했다.
결의안의 요지는 ①북한은 즉각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 ②북한은 일체의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 ③유엔 회원국은 북한에 대해 어떤 종류의 원조도 중지할 것 ④유엔 한위(UNCUK)는 이 결의안이 시행되는지를 감시해 안보리에 보고할 것 등이었다.
장 대사와 내가 회의장에 앉아있는 사진은 뉴욕타임스지 6월26일자 1면 톱에 게재되었다.
하오 5시30분쯤 회의가 끝나자 장 대사와 나는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을 새우다시피 해 나는 유엔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보고서를 각성했다.
6월26일 월요일 낮12시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째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전화를 받았다.
이 대통령의 목소리는 토요일 밤과는 달리 확연히 떨리는 기색이었고 흥분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 역력했었다.
이 대통령은 『「필립」, 일이 맹랑하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히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각 장 대사 모시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곧이어 장 대사와의 통화가 끝난 뒤 나는 국무성의 「나일스·본드」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태의 시급함을 인식한 국무성의 반응은 퍽 적극적이었다. 20분 뒤 「본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오 3시에 백악관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장 대사와 나는 비통한 심경으로 백악관에 갔다. 의전관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룸으로 가는 동안 복도에 보도진들이 꽉 들어찬 것을 볼 수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불그스레한 혈색에 약간의 미소를 띠며 초췌한 우리의 모습을 응시했다. 옆에는 키 큰 신사 풍의 「에치슨」 국무장관이 앉아 있었다.
장 대사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지시 내용을 그대로 얘기하고 그것을 문서로 만들어 전달했다.
우리의 얘기를 다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국민·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며 국민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있다. 미국 독립전쟁 때 독립군이 무기·식량난에 어려움을 겪어 낙담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이 우리를 도와준 적이 있다. 또 1917년 유럽 제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아 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을 때 미국은 그 지원에 나선 적이 있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의 이 말뜻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트루먼」은 외교정책 수립에 있어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 두 가지 사례를 설명한 것은 한국을 지원할 생각이 있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곧 지원해 주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트루먼」은 이날 일을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히고있다. 『이 대통령의 지원호소 메시지를 들고 온 장면 대사는 어찌나 풀이 죽어 있는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나는 그를 위로했다. 전투를 시작한지 48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역사를 보건대 다른 나라사람들은 더 절망적인 정세에서도 자유를 수호하고 승리를 얻은 경우가 있다. 기운을 내라고.』
그러나 분명히 밝힐 것은 그 날 장 대사나 내가 침통했던 것은 사실이나 울지는 않았다.
우리가 오벌 룸을 나서자 수십 명의 보도진들이 둘러싸 질문공세를 폈다. 내가 메모 지에 써서 장 대사에게 드린 답변 내용은 『우리는 결사적으로 싸우고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이 침략을 우리 혼자 힘으로 막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미국 정부와 국민이 지원해주기를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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