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작가 배출 아닌 생활화가 목적…폭넓은 연령층의 참여 바람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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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벌써 이 겨레 시 짓기 운동의 봉화가 오른지도 반년을 바라보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수록 투고자 여러분의 호응도에 있어서나, 투고해 온 작품의 질량 면에 있어서나 성과가 컸다는 것은 우리모두 다같이 경하해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일은 투고자 여러분들의 연령도 이 20대에서 30대까지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10대의 소년 소녀에서부터 60대 70대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의 폭이 넓혀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조란에서는 무슨 시인을 배출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조 짓기 운동을 온 국민에게 확산시켜 생활화하고, 그로 말미암아 식어 가는 민족정서를 재조명하여 각박한 세태에 윤기를 들리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가 난삽해지거나 현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시조는 더 쉬워져야(결코 저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겠다는 이야기다.

<창을 열뜨리면 와락 달려들듯이 만장초록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꾀꼬리 부르며 따르며 사이사이 걷는다> 조운의 『불갑사 일광당』이라는 단수이다. 쉽고 간명하면서도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등대섬』(변량수) 자갈밭을 걷다가 구슬을 주운 느낌이다. <빈 들녘 풀꽃보다 더 나앉은 호젓한 섬>어떤 사물을 사념의 바깥에다 내다 앉힐 줄 아는 지혜. 가품이다.
『한강변에서』(전향난) <먼 눈으로 다 못 쫓을 흐름은 길이 멀고>초장부터가 비범하다. <강 건너 행주산성 지친 하루 눈감으면>초장과 중장 사이의 항간에도 운(비약)을 줄줄 아는 사람. 발분을 빈다.
『용문사에서』(이강룡) 아무 나무랄 곳 하나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너무 산문적인 묘사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일까.
『고가 마을』(김호련) 종장마다 살려내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도 아닌 것을 별 것으로 만들어 내는 데 시의 묘미가 있다.
『사모곡』(차정미) 테크닉 면에 있어선 많이 모자랐지만 그 곡진한 것을 샀다. <정완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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