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136)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2)|한표욱|연전시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도미 유학을 목표로 입학한 연전 시절. 나는 영어가 학문의 전부이다시피 몰두해 파고들었다. 학교의 교과 편성도 문과의 경우 영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문과과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나의 이런 향학 태도를 적극 격려해 주었으며 졸업하면 꼭 미국 유학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영어 독본은 이묘묵 박사가, 문법은 이지하 선생이, 회화는「언더우드」학장의 부인이 가르쳤는데 당시로서는 영어 공부에 가장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독본을 가르친 이묘묵 박사는 정부 수립 후 주영 공사를 지냈고 이양하 선생은 60년대까지 국내 영문 학계의 원로로 수많은 학적 공로를 남겼다. 백 박사를 제외한 나머지 세분 선생님은 모두 작고했으며 금년 봄 내가 모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고인들에 대한 추억담을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취미와 노력 탓이 컸겠지만 교내 영어 웅변 대회에서 두 번이나 등을 했으며 영어는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교우 관계는 1년 밑인 이용희 전 통일원 장관과 각별히 지낸 편이며 김태하(작고) 이영근(작고)등과도 친히 지냈다.
우리들은 한때 영문학에 심취해「셰익스피어」등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4학년에 진학하자 나는 구체적으로 유학 문제에 대한 궁리를 시작했다.「언더우드」학장은 되도록 우수한 학생들을 골라 도미 유학을 시키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수준의 학생이면 학교의 추천이 가능했다.
나는 이미 백낙준 박사의 눈에 띄어 유학을 간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백 박사는 나를 오리건주의 윌러메트 대학에 등록금 면제의 장학생으로 주선해 주었다. 감리교 개통의 학교인 윌러메트 대학은 세일렘시의 강변에 위치한 대학으로 교명이 인디언어에서 유래했다.
학교측은 나 말고도 김태하·이영근에게도 유학을 알선했는데 우리는 졸업 전에 이미 유학 갈 미국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아 놓았다.
그러나 막상 유학 절차를 밟으러 하니 문제가 생겼다. 조선총독부로부터「일본정부」의 미국행 여권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김태하·이영근은 그래도 쉽게 여권이 나와 38년6월7일 미국으로 떠났다.
나의 여권 발급이 지체된 것은 순전히 셋째형과 월남 이상재 선생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었다.
월남 선생은 젊어서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구한말)의 1등 서기관을 지냈으며 그후 대한 제국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주권이 일본에 박탈되자 그는 한국의 장래를 위한 유일한 운동은 오직 하느님을 받들어 청년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승만 박사와 함께 YMCA일에 전념했었다.
자연히 애국 청년들이 YMCA로 몰려들었다. 선생은 지방을 돌며 선교와 계몽운동을 폈는데 가는 곳마다 예배당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일본 경찰에 꼬투리가 잡히지 않게끔 풍자로써 대중에게 조국애를 불러 일으켰다.
후일 월남 선생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독립 운동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람이 많다. 나의 셋째형도 이름이 나지는 않았지만 선생을 흠모한 열혈 청년이었다.
내가 여권을 못받아 침울해 있으니까 양주삼씨(초대 감리교 총리사)같은 이는『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우선 일본으로 가서 천천히 미국 유학을 추진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까도 생각하고 있던 어느날 학교 기숙사의 사감보가 나를 찾아와『도와주겠다』며 함께 나가자고 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혼마찌로 가서 명치 캐러멜점의 초컬릿 1상자를 사더니 경시청의 외사과장집을 찾아갔다.
얼떨결에 따라 왔지만 입장이 거북했다. 당시 일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 외사과장은『미국에 간다지』라며 말을 걸어 왔다. 그러면서 자신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왔으며 한때 미국 유학을 꿈꾸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나의 신상 명세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비교적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여권을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반쯤 포기 상태에서 진로 문제를 조용히 생각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이미 미국 대학의 학기도 놓쳤다. 먼저 미국에 간 친구들을 생각하며 마음의 감정을 하지 못하고 있던 10월 중순쯤 사감보로부터 전보가 왔다.『여건이 나왔으니 빨리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