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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 윤리답안 '화이트' 수정 허용 … 규제개혁 건수로 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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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3일 청와대에서 규제개혁 장관회의가 다시 열린다.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며 TV 생중계로 끝장토론을 했던 그 회의다. 5개월 만에 두 번째 장관회의를 하지만 그간의 성적은 초라하다. 첫 회의가 열린 3월에 비해 규제 축소는 게걸음이다. 게다가 풀린 규제의 상당수는 본질과 거리가 먼 좁쌀 규제이거나 곁가지 규제다. 덩어리 규제 등 본질적인 규제는 고래 심줄처럼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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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정부의 규제정보 포털에 등록된 규제는 1만5261개다. 첫 회의가 열렸던 3월(1만5303건)에 비해 42건 줄었다. 정부에선 “역대 정부에서 규제 개혁을 선언한 후 규제 건수가 줄어든 것은 김대중 정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청와대는 당초 지난달 20일 2차회의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당시 규제정보 포털에 등록된 규제(8월 14일 1만5326개)는 오히려 3월 말보다 23개 늘어나 있었다.

 대통령의 질타가 있었고, 등록 규제는 2주 남짓한 사이 65개 줄었다. 벼락치기의 결과인 셈이다. 박 대통령은 비서관들에게 “지난 5개월 동안 최선을 다했느냐”고 반문하며 “기업이나 소상공인이 얼마나 애가 탔겠나.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억지로 양은 줄였지만 규제 개선의 질은 낮다. 규제 포털에 각 부처가 게시한 규제 해결 사례는 168건이다. 국토교통부(13건)·관세청(11건)·법무부(10건) 순으로 많았다. 하지만 ‘경제 살리기’란 정부 목표를 충족시키는 것과는 동떨어졌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작은 규제들이 대부분이다.

 법무부는 법조 윤리시험 답안지를 작성할 때 수정액이나 수정 테이프(일명 화이트)를 써서 답안을 정정하면 오답으로 간주해오던 규제를 풀었다고 공개했다. 여성가족부는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됐을 경우 로그인할 때마다 성인인증을 받도록 한 것을 매년 1회로 바꾼 것을 규제 포털에 올렸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수리현장 공개를, 안전행정부는 고속도로 휴게소 여성 화장실 개선, 국세청은 음식점 폐업신고 간소화로 규제를 개선했다고 밝혔다. 송원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경제 살리기를 위해 필요한 토지이용 규제 완화, 지자체 인허가 간소화 같은 묵은 규제가 풀려야 규제 개혁이 경제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선 두 달간 규제입법 85건 발의=경제 살리기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팔짱만 끼고 있는 국회의 행태는 그대로다.

 경제활성화 법안 30건은 무더기로 국회 계류 중이거나,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산업 발전 기본법은 2년 넘게 상임위 심사 단계로 발이 묶여 있었다. 국내 보험사가 외국인 환자를 국내 의료기관에 소개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 등 12건은 1년 이상 멈춰 서 있다. 이 법이 통과되면 보험협회 추산 6만 명의 외국인 환자를 유치해 1100억원대의 신(新)시장이 생길 수 있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은 ‘묻지마 입법’을 통해 새로운 규제의 씨앗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규제정보 포털에 따르면 지난 7월 1일 이후 두 달간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률안으로 생길 수 있는 규제는 85건에 이른다.

이목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발의한 4대 사회보험료 징수 업무의 민간 신용정보회사 위탁 금지 등의 법안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규제 축소는 지지부진하고, 국회는 규제 양산소 역할을 멈추지 않고 있는 셈이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정부 부처는 책임지는 게 걱정돼 규제를 쉽게 풀지 못하기 때문에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국회와 정부가 합심해 경제 살리기를 위해 기업 투자, 외국인 투자를 늘릴 수 있는 규제부터 우선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몰라서 못 지키고, 알아도 못 지키는’ 황당 규제도 여전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뽑은 대표적 황당 규제는 가정의례준칙이다. 우리 가정의례준칙엔 약혼식이 금지돼 있다. 혼인할 때는 예단은 검소하게, 혼인당사자의 부모에게 건넬 수 있도록 했지만 이를 알고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전경련 관계자는 “처벌 규정이 없지만 공무원이 얼마나 규제에 무감각하고, 한번 만든 규제 조항의 생명력이 얼마나 긴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경주용 자동차가 내뿜는 굉음 자체가 경기를 즐기는 한 요소인 레이싱 경기장에 대한 소음규제(110)도 있다.

도로교통법에도 황당한 조항이 여럿 있다. ‘보행자는 모든 차의 바로 앞이나 뒤로 횡단해서는 안 된다’ 같은 조항이다. 하나 마나 한 얘기다. 경범죄처벌법도 모호한 규정이 많다. 예컨대 여러 사람이 모이거나 다니는 곳에서 영업을 목적으로 떠들썩하게 손님을 부르면 범칙금 5만원을 물게 돼 있다. 이대로 하면 시장 상인은 모두 법을 어기는 셈이 된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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