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지우개·지점토 … 유해물질에 둘러싸인 아이들 어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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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건강을 위해서라면 작은 용품이라도 친환경 제품을 선택하는 등 꼼꼼히 챙겨야 한다. [사진은 현재 출시된 친환경 제품 모음, 사진협찬: 모나미·굿필코리아·모닝글로리·HEAD]

초등학교 2학년 김희망(9·여·가명)양은 오전 7시에 일어나 이를 닦고 샴푸 하며 등교 준비를 한다. 책가방을 멘 후 집을 나선다.

학교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수업시간에는 필통·지우개를 사용한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어린이용 매트 위에서 운동을 한다.

방과 후에는 비눗방울과 작은 장신구가 달린 인형을 가지고 논다. 귀가 후 간식은 맨손으로 먹는다.

우리나라 어린이의 평범한 하루 일상이다. 하지만 김양은 수많은 유해물질에 노출돼 있다. 평소 사용하는 용품이나 활동 공간이 모두 복병이다.

환경부는 “어린이는 집과 학교 등 실내공간에서 하루 20시간 이상을 보낸다”며 “성인보다 체격이 작고 성장기에 있어 내분비계 장애를 일으키는 물질의 혈중 농도가 높다”고 밝혔다.

어린이, 성인보다 환경유해물질에 더 취약

국내에 유통되는 유해물질은 총 2000여 종에 이른다. 프탈레이트 가소제·납·카드뮴·니켈·비스페놀A·수은·비소 등이 주범이다. 이들 물질은 인형·고무공·비눗방울 같은 완구는 물론 지우개·크레파스·지점토 같은 문구에도 함유돼 있다. 대표적으로 PVC가 있다. 가격이 저렴하고 제조가 쉬워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딱딱한 PVC를 부드럽게 만드는 프탈레이트 가소제는 발암물질이다. 어린이용품에도 함유돼 있다. 피부에 닿거나 숨을 쉬면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들어온다. 인천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김상용 교수는 “어린이는 성인에 비해 운동량과 호흡량이 많아 호흡기를 통해 섭취하는 유해물질도 더 많다”며 “PVC 같은 유해물질은 학습능력 저하나 지적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어린이용품의 유해물질 허용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이건강국민연대는 “여전히 학생가방·필통·슬리퍼 같은 어린이용품에 PVC가 넘쳐난다”며 “이 외에도 천·종이·EVA재질·합성수지제로 제작된 제품에도 유해물질이 함유된 것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화여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하은희 교수는 “특히 유해물질과 접촉하는 시간이 길고 빈도가 높은 어린이일수록 많은 유해물질이 체내에 축적돼 있다”고 말했다. 실제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에 따르면 어린이의 내분비계 유해물질 혈중 농도는 성인보다 높았다. 비스페놀A는 성인에 비해 1.6배, 프탈레이트 가소제는 1.5배나 됐다.

기준 모호하고 지켜지지도 않아

관련 기준이 부실하고, 준수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어린이 완구에 프탈레이트 가소제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어린이용품의 PVC 사용 중지를 권고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린이 용품에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에 따라 자율안전확인 후 KC마크를 부착해 판매토록 하고 있다. 특히 이마저도 준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소비자원이 최근 초등학교 주변 문구점에서 완구 29개를 분석한 결과, 유해물질 허용 기준치를 웃도는 제품도 다수였다. PVC는 17개 대상 완구 중 2개 완구에서 기준치(0.1% 이하)의 113배(11.31%), 138배(13.8%)가 검출됐다. 10개 대상 완구 중 4개 완구에서 납은 기준치(300㎎/㎏)의 1.5~125배, 니켈은 기준치(0.5㎍/㎠/week)의 11~21배가 초과 검출됐다. 10개 완구는 KC마크 관련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국내 규정이 없다 보니 해외 규정을 참고하기도 한다. 한국소비자원은 여름철 인기인 비눗방울 장난감 22종을 조사해 3개 제품 제조업체에 리콜을 권했다. 이 제품에서는 EU 장난감 안전기준을 초과해 병원성 세균이 검출됐다. 우리나라 어린이 완구 안전기준에는 미생물 관련 검사기준이 없다.

우리나라 어린이, 유해물질에 물들다

우리나라 어린이는 선진국에 비해 혈중 유해물질 농도가 높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의 혈중 납의 농도는 1.26㎍/dL, 청소년 1.11㎍/dL로 미국(어린이 0.98㎍/dL, 청소년 0.80㎍/dL)과 캐나다(어린이 0.79㎍/dL, 청소년 0.71㎍/dL)보다 높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수치로 10㎍/dL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납은 적은 양에도 신경계 손상, 학습장애 등을 유발한다.

혈중 수은 농도, 모노부틸프탈레이트(MnBP)의 요중 농도 역시 미국과 캐나다보다 높았다. 환경부는 “유해물질은 손가락을 빨거나 바닥에 앉아 노는 어린이가 청소년보다 2배 높았다”며 “지속적인 노출 저감 노력이 필요하다. 손 씻기 같은 건강한 생활습관 교육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어린이 안전기준 꼼꼼히 확인해야

어린이용품의 유해물질은 성장기 어린이에게 치명적이다. 대표적인 유해물질인 내분비계 장애 물질은 아직 어떤 질환을 일으키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이의 생식기능, 성장발달 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프탈레이트 가소제는 간·신장·고환에 악영향을 준다. ADHD의 원인이 된다. 소아기에 이 유해물질에 노출되면 성인이 돼 비만·당뇨병 같은 건강 이상을 일으킨다. 비스페놀A는 에스트로겐 등의 호르몬을 교란시킨다.

중금속은 체외로 배출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된다. 많은 양의 납에 노출된 어린이는 신경계와 신장의 손상, 학습장애와 ADHD, 청력 손상, 말하기 문제 같은 이상을 일으킨다. 니켈은 알레르기 반응·피부장애·두통·현기증 등을 유발한다. 어린이는 성인보다 피부가 연약해 여러 화학물질로 인한 부작용 발생 확률도 높다. 색소나 일반세균도 어린이에게는 치명적이다.

환경부는 “평소 어린이 건강을 위협하는 환경유해물질의 노출 경로와 건강 영향에 대한 정보를 알아두고, 이들 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어린이의 옷·수건·베개·이불은 모두 면 제품을 사용하고, 세제의 프탈레이트 가소제가 깨끗이 제거되도록 여러 번 헹궈야 한다. 샴푸도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어린이용품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김상용 교수는 “옷이나 장신구에 붙어 있는 작은 부품이나 장난감에 사용하는 단추용 전지 같은 위험 제품은 삼킴·흡입 사고의 주요 원인”이라고 밝혔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완구의 작은 부품을 삼키거나 흡입한 사고는 총 1581건이나 발생했다. 한국소비자원은 “관련 기준이 무시되는 경우가 잦다”며 “완구 구매 시 안전 문구나 연령 경고 문구는 표시돼 있는지, 또 이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단추형 전지를 삼키는 사고도 증가 추세다. 2010년 41건, 2011년 61건, 2012년 78건, 2013년엔 74건이 발생했다. TV리모컨·완구·3D안경·체중계 등 사용하는 제품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추용 전지를 삼키면 타액으로 전류가 흘러 화상·천공으로 조직이 손상될 수 있다. OECD는 세계에서 공통으로 발생하는 안전문제의 의식 제고를 위한 ‘제1차 국제의식주간’에서 단추형 전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KC마크=안전·보건·환경·품질 등 분야별 인증마크를 국가적으로 단일화한 인증마크다. 13개의 서로 다른 법정 강제인증마크를 통합한 것이다. 유사한 인증마크로 유럽연합의 CE마크, 일본의 PS마크, 중국의 CCC제도가 있다.

한석영 기자 syhan@joongang.co.kr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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