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통일증권」설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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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증주작전은 결국 실패했다. 국채파동으로 침체된 증권시장을 주식시장을 통해 육성시키려 했던 것이나 자본주인 이석운 씨의 재력이 의외로 적어서 뜻대로 되지 못했다.
이씨는 대증주작전의 실패로 재산도 많이 없어지고 빚도 많이 남았을 것이다.
필자는 5·16혁명 후 동명증권 강성진 상무에게 3억원 정도 보아드리라고 해서 대증주작전 때 없어진 돈을 보상했다.
그후 창일증권을 인수하여 경영을 해보기도 했으나 별 재미를 못 보고 타계했다.
대증주작전의 실패 후 뚜렷이 하는 일없이 지내다가 61년을 맞았고 5월16일 혁명이 일어났다.
육군정보국에 근무하던 조규호 씨(당시소령)와 강성원 씨(당시 소령)가 혁명정부의 고문이 돼달라고 말했다.
필자는 해방 후 통신사와 증권계에 들어가 일한 경험밖에 없어 별 쓸모 있는 사람이 못 될 것이라고 사양했다.
그러던 차에 용산경찰서에서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조동엽 씨의 고소사건이 기소되어 명동 집으로 소환장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주소불명이어서 구인장을 용산경찰서로 내보냈다는 것이었다.
재판소 구치소에 수감됐다. 국채파동의 후유증으로 2번째 수감된 것이다.
1차 수감 때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난 후 명동 집을 채권자들에게 넘겨준 뒤 용산 셋방에서 살고 있던 터라 이 사건으로 구인장까지 발부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혁명직후 혁검부장인 박창암 씨가 교도관의 부정을 막기 위해 서대문구치소와 재판소간의 버스운행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나는 재판소 구치소에서 서대문서울구치소까지 땀을 흘리며 걸어다녔다.
조씨는 나를 구속시키면 혁명정부가 공정한 재판을 하여 돈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나를 추적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10시쯤 보석금 3만원을 내고 석방됐다.
필자가 구속되자 조규호 씨가 강성원 씨에게 이야기하여 혁명정부가 국가산업발전에 필요한 사람이라며 빨리 내놓으라고 요청케 함으로써 보석이 되고 그후 재판에서도 무죄판결로 끝났다.
조씨에 대한 책무는 그후 형편이 좋아짐에 따라 경희증권 사장 김창배 씨를 통해 갚아드렸다.
61년8월12일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은 62년8월15일을 기해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필자는 즉시 중앙정보부 강성원 씨에게 연락하여 충무로 어느 다방에서 만났다.
그렇게 쉽게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뀌겠느냐며 민정으로 이양하는데는 우선 1백억 환의 정치자금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돈 있는 사람은 부정축재혐의로 묶여있으며 또 돈이 있다하더라도 이권에 관계없이 내놓으려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내가 1백억 원을 만들어 줄 터이니 3개월간 7역원정도의 자금을 빌려달라고 했다.
강씨는 자신은 돈에 관한 한 문외한이라며 정지원 씨(당시 소령)를 소개했다.
민정이양발표 후 4개월간을 명동메트로호텔에서 연구준비한 끝에 12월23일 홍병준 씨를 불러 통일증권의 설립을 지시했다. 자본금을 5억원으로 해서….
홍씨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의 증권회사 자본금 2천만∼3천만원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자본금은 정씨의 소개를 받아 융통했다.
다음해 1월9일 재무부장관의 인가를 얻고 국채파동으로 팔았던 필자의 명동 집을 다시 매입하여 통일증권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필자는 그때 2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자본시장의 육성을 통해 선진국과 같이 증시에서 산업자본을 조달한다는 것과 둘째 혁명주체세력을 중심으로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해서 정국의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점이었다.
나는 1월7일부터 주문을 냈다. 액면 50전 짜리 대증주는 1월7일에는 1환3전선에 와있었다.
필자는 총 발행주식 12억주 중에서 6억 주를 목표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5억5천만 주를 샀는데 2환선에 육박했다. 나는 지난 59년의 대증주작전 때와 마찬가지로 2환선은 넘기지 않으려고 매입했던 5억5천만 주를 모두 보도해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에는 2환선으로 훌쩍 뛰어넘어 섰다. 이상한 것은 대한증권의 송대순 씨와 태평증권의 오계선 씨가 대증주를 78전까지 내려서 각각 1억주 이상을 매도해 버렸다. 알고 보니 한일은의 보유주식 매도주문을 2개회사가 서로 받은 것으로 알고 매도를 한 것이었다.
결국 한일은행보유 대증주는 실물이 태평증권으로 가게되어 송대순 씨는 눅은 시세로 공매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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