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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사진·음악이 준 가르침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어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0호 26면

인생만사 다 새옹지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위기를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어려움을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로 만드는 게 진짜 능력이다. 패션 사진작가 케이티 김(KT KIM·한국이름 김경태·53)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덮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그 위에 올라타려고 노력했다. 그의 ‘인생 서핑’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다.

UN 관련 단체와 맨해튼서 패션 사진전 여는 케이티 김

1~5 케이티 김의 사진작품들

제 1막, 영어와 클럽 DJ
국민학교 3학년 때 폴 앵카의 ‘파파’를 즐겨 흥얼거리던 소년은 아버지가 무슨 날이나 돼야 장롱 속에서 꺼내던 사진기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경기고에 입학한 뒤 사진반에 들고 싶었지만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컸다. 대신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본을 불었다. 클래식 곡을 중심으로 한 연주였다.

“고3 때 집에 빨간 딱지가 붙었어요. 한 대학 국문과에 합격했는데, 입학금 36만5000원을 구하지 못해 결국 대학을 포기했죠.”

그의 유일한 낙은 영어였다. 훈육주임 영어 선생님은 교실에만 들어오면 첫 마디가 “50번 김경태, 읽어”였다. 그 스트레스가 재미가 됐고, 어느새 재주가 됐다. ‘대학은 못 가도 영어는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곤 했다. 스무 살 때 길거리 캐스팅돼서 CF도 좀 찍었지만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역삼동 한 디스코텍에서 DJ 보조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외국인 여자 DJ가 나왔어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 보니 저하고만 얘기를 했는데,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조선호텔에서 DJ를 구한다고, 한번 가보라고.”

이미 장안의 쟁쟁한 DJ 여럿이 지원한 상황. 노래와 가수를 골라 외우고 커닝페이퍼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오디션 도중 그만 쪽지가 발각됐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영국인 DJ가 그에게 따졌다. “이거 당신이 썼어?” “…예.” “가수 이름, 노래 제목을 스펠링 하나 안 틀리고 적은 건 처음 본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호텔에서 방도 주고, 밥도 주고, 옷까지 세탁해주었다. 이름도 KT KIM이 됐다. 이곳에서 그는 쌍코피가 날 정도로 일했다. 호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영어 듣기평가에서 1등도 했다. 무엇보다 전세계 디스코텍을 관리하는 영국 회사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선곡하는 요령, 분위기 띄우는 방법, 당시 첨단 기술이었던 레이저 조명 작동법까지. 방한한 영국 회사의 사장은 그의 재주를 보고 본사 직원으로 발탁, 40일간 유럽 연수까지 시켜줬다. 견문이 확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88올림픽을 전후해 이태원 등지에 첨단 장비를 도입한 클럽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르망을 한 대 사서 기사를 두고 차에서 김밥 먹으며 DJ하러 다녔습니다. 최대 7군데까지 뛰었죠. 그때 돈 좀 벌었습니다.”

제 2막, 패션과 사진
클럽을 찾던 연예인, 모델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겼다. 그들의 해외 촬영에 통역으로 다니면서 그는 패션 사진가들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영국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의 흑백 사진에 마침 감동을 받고 있던 차였다.

“저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92년 4월 도쿄에 출장갔다가 카메라를 처음 샀어요. 콘탁스 167MT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유명한 사진가 밑에 조수로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건 남의 기술을 훔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책을 사서 독학을 시작했어요. 외국 사진기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새로운 기법을 배우기도 하고요.”

소방차 멤버 김태형의 솔로 앨범을 비롯해 심신, ‘잉크’의 만복이, 부활 등의 레코드 재킷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8년 여를 사진에 미쳐 지냈지만 뭔가 아쉬웠다. 나만의 것이 없었다. 자신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나는 표준렌즈만 쓴다’고 한 얘기가 떠올랐어요. 대가들 말을 믿어보자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표준렌즈만 씁니다.”

초점을 ‘패션 사진’으로 잡은 그는 2001년 한국 패션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쿠바에 들어갔다. 친하게 지내던 패션 피플과 브랜드의 협찬을 받아 마련한 브랜드 의류를 거리 캐스팅한 모델에게 입히고 실제 거리에서 색다르게 찍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름하여 ‘스트리트 스마트’. 이렇게 찍어온 사진들이 한 패션 잡지에 고스란히 실리면서 그는 비로소 국내 패션 사진계에 이름을 올렸다. 김희선·송혜교 등 국내 톱 스타들과의 작업이 이어졌다.

“2003년에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디자이너 톰 포드의 백스테이지 취재 허가를 동양의 포토그래퍼로는 처음으로 얻어냈습니다. 당시 찍은 사진 2장은 이듬해 톰 포드측으로부터 회고록 『TOM FORD』에 쓰겠다는 연락을 받았죠. 리처드 아베든, 애니 레보비치, 부르스 웨버, 마리오 테스티노, 스티븐 마이젤 같은 거물 사진 작가들과 함께 였어요.”

그의 사진의 강점 중 하나는 순간포착이 강하다는 점이다. 밥 먹을 때도 항상 어깨에 라이카를 메고 먹었을 정도다. 군악대에서 트럼본을 불던 방위병 시절, 사단장으로부터 “사격이란 이런 것”이라는 칭찬과 함께 포상휴가를 받았을 정도로 과녁지를 걸레로 만든 빠른 손놀림과 날카로운 눈매는 그가 자신만의 ‘점·선·면’을 구성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인적이 드문 달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독특한 구도로 잡아낸 고양이 시리즈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특히 지붕에서 지붕으로 점프하는 ‘날아가는 고양이’를 비롯한 사진들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일본 최고의 고양이 잡지 ‘네코’에 두 차례에 걸쳐 실렸고, 세계적인 사진잡지 ‘비저네어’에도 소개됐다.

제 3막, 봉사 그리고 나눔
2005년 서울 청담동 더 컬럼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위해 디스플레이를 마친 그는 비로소 병원으로 향했다. 부쩍 피곤하던 차였다. “신장암 2기입니다. 수술 생존 가능성은 50%입니다.”

청천벽력이었다.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주변에는 “그냥 간단한 수술이야”라고만 했다.

“잡지사 팀과 회의를 하는데 문득 ‘내가 그동안 너무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이런 것을 매일 보는 축복 속에 살았는데, 이걸 두고 가야하다니…’. 견딜 수 없었죠.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어요. 저를 살려주시면 꼭 좋은 일을 하겠다고.”

수술 후 식생활을 철저하게 조절하고 자전거 타기 등 운동에 몰입했다. 단식원에 들어가 생야채 위주로 먹으면서 몸무게도 15kg이나 줄였다.

그리고 2011년,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UN이 지정한 ‘월드 말라리아 데이’와 관련, 말라리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로 모기장을 보내는 운동 ‘Fashion Net’s Go!’를 후원하는 국내 행사의 기획 및 총감독을 맡았다.

“UN재단에서 감사장을 받고 나서 ‘덤으로 사는 인생, 더 좋은 일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김나연· 현대무용 의상디자이너)와 상의해 지난해 뉴욕으로 거쳐를 옮기고 ‘온더리스트(ON THE LISZT)’라는 회사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일이 맡겨졌어요. 패션계의 힘을 모아 세계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의 UN 단체 ‘패션 포 디벨럽먼트(Fashion 4 Development, 이하 F4D)’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게 됐습니다.”

F4D의 아트 디렉터로서 그는 오는 9월 맨해튼에서 두 가지 커다란 행사를 벌인다. 하나는 유엔의 모자보건 프로젝트 ‘Every Woman Every Child’를 후원하는 패션 사진전 ‘R.S.V.P’를 9월 9일 맨해튼 세인트 레기스 호텔에서 개최하는 것. 자신의 패션 이미지 사진을 내놓는다.

다른 하나는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각국 유엔 대사의 부인들을 초청해 F4D가 9월 23, 25, 26일 맨해튼 피에르(Pierre) 호텔에서 개최하는 ‘F4D’s FIRST LADIES’다. F4D의 에비 에반겔로우 회장과 이탈리아 보그의 편집장 프랑카 소차니를 비롯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부인인 유순택 여사, 세계적인 디자이너 도나 카란 등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

“이제는 제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한인 2세와 3세들이 아티스트로 재능을 키우는데 패션과 사진, 음악과 관련된 저만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고 싶어요. 사진을 어떻게 하면 잘 찍는 지도 책을 통해 공유할 생각입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ON THE LIS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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