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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노벨상과 베르나도테 왕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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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29면

독일 남부 린다우에서 1951년부터 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매년 열려온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모임’과 2004년부터 자매 행사로 진행돼온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모임’이 올해 중앙SUNDAY의 보도로 한국에도 본격 소개됐다.(7월20일자 및 8월24일자)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에 걸친 보덴(영어 콘스탄스, 프랑스어 콩스탕스) 호수의 작은 섬 린다우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독일 과학자들의 열정과 인근에 살던 한 스웨덴 왕족의 헌신이 빚은 결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51년 린다우의 의사 구스타프 파라데와 프란츠 카를 하인은 인근에 살고 있던 스웨덴 왕족 레나르트 베르나도테(1909~2004)를 찾아가 노벨상 수상자 모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베르나도테가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행사가 시작됐고 올해로 64회를 맞았다. 노르웨이에서 시상하는 평화상을 제외한 다른 노벨상은 스웨덴 군주가 시상하므로 스웨덴의 베르나토테 왕실 출신이 수상자 모임을 주도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레나르트는 보덴호의 마이나우 섬에서 취미인 조경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스웨덴 구스타프 5세 국왕(재위 1907~1950)의 손자이며, 구스타프 5세의 차남인 빌헬름 왕자(1884~1965)의 외아들인 그는 낮은 순위지만 왕위 계승권과 스몰란드 공작 작위를 보유했다. 하지만 32년 평민인 카린 니스반트(1911~1991)와 결혼하면서 왕위 계승권과 작위를 잃게 됐다.

1810년 만들어진 스웨덴 왕위 계승법은 군주나 정부의 동의 없이 결혼한 왕자나 공주는 본인과 후손의 왕위 계승권과 작위를 박탈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평민과 결혼할 경우 적용된다.

하지만 예우 차원에서 왕위 계승권 상실자에겐 1868년부터 외국 작위를 대신 받게 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4명의 스웨덴 전 왕자가 룩셈부르크 대공국으로부터 비스보르크 백작 작위를 받아왔다. 레나르트는 51년 이를 받아 비스보르크 백작 레나르트 베르나도테로 불리게 됐다. 이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한 결혼이었지만 40년 만인 72년 이혼하고 그해 소냐 하운츠(1944-2008)와 재혼했다. 첫 결혼에서 1남3녀를, 재혼에서 2남3녀를 얻었다. 세상을 떠나 마이나우의 영지에 묻혔는데 재혼한 부인에게 옆자리를 내줬다. 첫 부인은 가족 묘지에 안장됐다.

레나르트는 80세인 89년 란다우 노벨상 수상자 모임의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부인인 소냐 공작부인이 넘겼다. 2008년 공작부인이 숨지면서 그의 장녀인 베티나 여백작이 위원장을 이어받았다.

지금 스웨덴 국왕인 카를 구스타프 16세도 평민과 결혼했다. 카를 구스타프 16세는 왕세자 시절인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통역을 맡았던 실비아 조머리아트와 76년 결혼했다. 결혼식 전야 행사에서 팝 그룹 ‘아바’가 초연하고 실비아 왕세자빈에게 헌정한 노래가 그 유명한 ‘댄싱 퀸’이다. 실비아 왕비는 왕족도 귀족도 아닌 독일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74년 만들어진 새 헌법에 따라 왕위 계승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헌법이 왕위 계승법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80년에는 장남 대신 남녀에 상관없이 첫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이에 따라 79년생인 장남 칼 필립 대신 77년생인 장녀 빅토리아가 앞으로 왕위를 잇게 됐다. 빅토리아도 2009년 평민으로 자신의 헬스 트레이너였던 다니엘 베스틀링과 결혼했다. 왕실의 현대화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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