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주석 송경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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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병으로 누워있는 손문 미망인 송경령이 중공의 명예국가주석에 임명됐다고 외신은 전한다.
지난49년 국민당 정부의 대당패주와 중공정권의 수립을 계기로 송경령은 국가부주석직에 「앉혀졌고」지금까지는 전인대 상무위 부위부장으로 있었다.
송경령의 일생은 그대로 중국근대사의 투영이다.
1890년 상해 절강재벌의 둘째딸로 태어난 송경령(숭침링)운 미국조지아주 웨슬리언여대에 유학중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조가 타도되고 중화민국이 수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2년의 일이다.
감격한 송경령은 기숙사에 걸린 청조깃발을 내리고 민국깃발을 걸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경령이 국부 손문과 결혼한 것은 그녀가 손문의 비서로 있다가 함께 동경에 망명했던 l914년의 일이다. 이때 손문은48세. 경령은 48세였으며 손문은 이미 16세때 결혼한 노씨와의 사이에 세자녀를 두고 있었으나 잦은 망명생활로 가족과는 유리돼 있었다.
손문은 1925년 2월, 세 통의 유갈을 경령에게 남기고 병사했는데, 마지막 한 통이 가족에게 남긴 글, 『나는 가산을 다스리지 못했으니 서적·의복·주택을 모두 처 경령에게 남겨 기념되게 하길 바란다』였다.
손문사후, 그녀와 장개석 사이의 갈등은 그대로 중국력사의 분빙령을 이루었다.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던 날 경령은 『당내 지휴자가 손중산의 정책을 실현할 수 없다면 이미 혁명의 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남기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1927년의 일이다.
당시 국민당 좌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경령의 눈에는 장개석이 지주계급과 손잡는 것이 손문의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장개석과 당시 26세이던 미령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2년 후에 귀국한 경령은 장개석이 일본군의 대륙침공을 당해서도 먼저 공산당욜 토벌하고 외적에 대처하겠다는 이룐바「선안내 후양외」의 원칙에 도전했다.
특히 33년엔 국민어모자구회를 만들어 국민당이 싸우지 않으면 민중 스스로가 일어나 대일항전에 나섬으로써 모멸을 막겠다고 선언했다.
모택간과 주은내 일당이 국부군에 쫓겨 정강산에서 연안까지 11년간을 피해다니던 1926년부터 37년까지 봉일항전의 불씨를 심은 것은 바로 경령이었다.
중공정권 수립후 그녀의 처지를 언젠가 뉴욕타임즈는 「새장 속에 든 의식없는 새」에 비유했다. 죽음에 임박해서 중공의 최고명예직을 차지한 그녀의 심경이 과연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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