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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1)|<제73화>증권시장(제자=필자)(39)-「투자개발공사」설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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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자본시장육성 법이 제정될 당시만 해도 국회의원들 중에 증권시장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5월 파동을 비롯한 잇단 파동으로 증권 하면 투기를 연상하고 증권은 위험한 것이며 잘못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국회 안에선 이남준 의원이 주로 설득을 담당했다. 하도 열성이어서 동료의원들로부터『도대체 당신은 얼마나 많이 주식을 갖고 있기에 그토록 열심이냐』 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에 개의치 않고 이 의원은 앞장서서 증시 육성을 역설했다.
자본시장 육성법 제정이 급진전을 보게된 것은 이 의원이 고 박정희 대통령을 특별 면회한때부터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개인의 사리를 위해 법 제정에 앞장선다는 모함과 관계기관의 비 협조로 몹시 고민하던 이 의원은 박대통령에게 면담 신청을 냈던 것이다.
청와대로 들어간 이 의원은 주식대중화에 의한 내자동원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다.
이 의원의 설명을 듣고 난 박대통령은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그 자리서 공화당·경제기획원·재무부 등에 전화를 걸어 법안을 세밀히 검토 보고하라는 지시를 했다한다.
이 법이 제안되었을 때의 재무부 이재국장은 현 무협회장인 김원기 씨였고 그 뒤 7대 국회(67년)에서는 장덕진 이재국장과 하동선 증권과장이 실무진으로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7대 국회에서는 이 법의 제정을 위해 직원들을 여관방어 투숙시켜 가면서 외국의 증권시장에 관한 참고 자료를 면밀히 분석 검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을 마련했다.
법이 성안되기까지에는 주위의 협조도 컸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대기업의 주식분산은 촉진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대한상의나 경제인 협회에서도 비슷한 건의를 했다.
특히 이 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증권업협회와는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으며 자본시장에 관한 문제점들이 수시로 검토되고있었다.
정부와 이 의원간에 한국투자공사의 설립문제를 놓고 심한 의견차이를 보인 적이 있다.
정부측에서는 별도기구는 필요 없고 산업은행에 증권투자개발부를 두자는 것이었으나 이 의원은 자본시장을 육성하려고 법을 새로 제정하는 마당에 전담 독립기구의 설립은 당연한 것이란 주장이었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근대화에 전기를 마련해 준 투자개발공사(후에 77년 초 증권감독원과 대한투자신탁이 설립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함) 의 업무내용은 유가증권의 발행과 분산을 촉진하고 그 인수를 원활히 하는 것과 주가안정을 위한 시장조절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 업무이외에도 증권담보금융, 증권투자신탁, 증권저축, 증권발행업무의 대행업무 등을 할 수 있게 했다.
증권의 불모지나 같았던 이 땅에 발행시장을 정착시키고 투자신탁과 증권저축업무를 새로 개척한 회사의 업적은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업무중에서도 「주식을 안정시키기 위한 시장 조정 기능의 부여는 증권시장을 키워 보겠다는 과감한 의욕의 표시였다.
당시만 해도 투기적 요소가 강한 주가의 폭등·폭락은 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증권시장이 커나가기 위해서는 광기 어린 주가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요할 때마다 공사로 하여금 주가를 공개 조작할 수 있는 기능을 주었던 것인데 자본금이 15억원에 불과한 적은 자금으로 그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실로 획기적인 규정이었던 것이다.
법 제정 한 달 후에 있은 공사의 현판식엔 박대통령도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이남준 의원의 그 동안의 노고를 높이 치하했다.
공사의 초대총재로는 한국산업은행부총재로 있던 이병준씨(현 한국투자금융사장)가 취임했다.
그러나 공사가 발족했다해서 내리막길에 있던 주가가 회복되지는 않았다. 성급한 기대를 하는 업자나 고객에게는 실망이 되기도 했다. <계속>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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