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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세대교체」를 계기로 본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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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새 시대 새 바람을 양익에 듬뿍 안고 재5공화국「검찰호」는 활주로를 이륙했다. 개혁의 의지와 국법 수호의 긍지, 신뢰의 창공을 향해 치솟는 것이다. 새 생명의 탄생이 모체의 진통 없이 불가능하듯 새 시대 「검찰호」도 탈각의 산고를 겪고 태어났다.
검찰사상 유례없던 핵심부의 공백을「혁신적」「파격적」인사로 재조직한 신생「검찰호」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세속적 권위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국민에게 오만하게 군림하지 않는 검찰 상을 바라기 때문이다. 검찰이「새대 교체」를 계기로 어제와 오늘의 실상을 조명해본다.

<검찰의 역사>
「검사」라는 어휘가 법문상 처음 등장한 것은 갑오개혁이후인 1895년 당시 법률 제1호로서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되어 법제상의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 다.
그러나 검사는 관사와 같이 각급 재판소의 직원으로 규정되어있었으며 1907년12월 재판소구성 법 시행령과 재판소 설치법이 재정 된 후에야 각 급 재판소에 대응하는 검사국을 두었다. 그때 만들어진 지방재판소 검사국·공소원 검사국·대법원검사국이 오늘의 지방·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의 모체인 것이다.
2년 후인 l909년에 사법경찰관에 대한 지위·감독·명령권이 주어졌고 48년8월 검찰청법 제정공포 때 처음으로 『징계처분 모는 금고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은 때 이외에는 그 뜻에 반하여 면관·정직·감봉은 물론 전관되지 아니한다』는 검찰관의 신분 보장조항이 삽입되었다.
대검 특별수사부(4월21일 중앙 수사부로 개칭)의 전신인 중앙수사국이 설치 된 것은 61년4월. 당시 법무부와 검찰이 구상했던 중앙수사국은 미국FBI와 비슷한 기구였으나 내무부 치안국의 반대로 국내대공점보·수사업무의 통할기구조건으로 발족키로 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검찰이 바라던 기구가 되지 못해 지지부진 끌다가 4·19후 대공수사활동이 침체되고 용공사상이 일어나자 정부는 부랴부랴 발족을 서둘렀고 초대국장에 정희택 대검검사(현 민정당의원) 가 선임되었다.
지금의 검찰조직을 갖춘 것은 73년l월 개점된 검찰조직법에 의해서이며 대검검사를 보좌하는 검찰 연구과제도 이때 신설되었다.

<검찰의 두 얼굴>
검찰은 본질적으로 행정권에 속한다.
그러나 검찰이 행사하는 공소권은 재판에 직결되어 재판과 다름없는 사법적 성질을 갖게 된다.
따라서 검찰권은 행정·사법권의 두 얼굴을 갖고있고 검사와 검찰청은 행정·사법기관의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검찰의 고민은 이런 양면성이 갖는. 갈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바로 정치에 의해 통제되어야함과 동시에 정치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야한다는 불가피한 이율배반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쩔 수 없는 검찰의 숙명적인 두 얼굴을 전제로 하고 볼 때 새 검찰조직의 주역인 이광원 법무부장관이 밝힌 『국가안보를 위하여 제약되어야한다는 인권개념은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신장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적극적 인권개념이나 허형구 검찰총장의『법은 권력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개개인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취임 초 소신은 두 사람 모두가 신생「검찰호」의 조종간을 잡은 검찰 「파일러트」라는 점에서 국민의 더 큰 관심을 모으고있는 것이다.

<귀면검사와 법의 수행자>
서울지검의 C모 검사는 중학교에 다니는 처남과 처음 대면했을 때 『검사는 머리에 뿔이 난 무서운 모습인줄 알았다』는 말을 듣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일반 시민 중에서도 검사는 으스스한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범법자를 구속하고 소추하고 그에게 징역을 살게 하거나 죽음을 구할 수 있는 처단 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지검장을 지냈던 서주연씨는 그의 저서『검사의 체온』에서 자신을 『염라국에의 길목에선 수문장』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사회정의를 수호해야하고 선의의 사람들의 생명·재산을 위협하는 일체의 죄악으로부터 그들을 단호히 지켜주어야 하는 나는 검사다』고 스스로를 다짐한다.
검사들에게도 눈물이 있고 뜨거운 가슴이 있다. 눈물과 뜨거운 가슴은 논고의 정상론에서 솟아난다. 추상같고 살을 저미는 어휘 속에 진정으로 인간과 사회를 사랑하는 검찰관들의 애정이 들어있다면 역설적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검사도 울고 피고인도>
67년12월6일「동백림 거점 북괴 대남 공작원 사건」구형공판장.
이종원 공안부장 검사의 논고가 정상론 대목에 이르자 법정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부장검사는 장장 1백30 페이지의 논고문중 정상론 부분에 이르자 그 자신 목이 메었다. 마치6·25의 민족적 비극을 재연한 듯한 이 논고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회자되는 명문으로 정상론 부분 중 일부를 소개한다.
『…보는 눈이 없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피고인들은 이제 세살박이도 혐오하는 공산당파 손을 잡았고 또 그들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는 않았던가요? 지성인의 긍지와 자람은 어디다 버리고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하는 것에 그렇게도 대담했습니까.
차라리 무식한 사람들의 소행이라면 겨레의 분노가 이처럼 진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계의 상아탑 속에서 10년을 닦은 학문의 소유자였기에, 아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기에 피고인들의 범행은 더 야속해지고 미워집니다. …(중략) 계순자 피고인은 아버지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워 자수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피고인은 바로 아버지까지를 배반했던 것입니다. 그 아버님이 어떤 아버님입니까(중략)
…이응로 화백을 이렇게 대하게될 때 본관의 마음도 아픕니다. 칠순의 몸을 이끌고 예술에만 전념하던 이 피고인이 어쩌다 이 모습이 됐습니까.
한국의 열을 「파리」 에 심는다고 떠나던 그때의 푸른 꿈은, 겨레와의 약속은 어디다 저버렸습니까. 정말 야속하고 섭섭합니다.
이화여고와 이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공보원, 배화여고에서 미술교사를 한바있는 박인경 피고인은 나이 많고 글 모르는 남편 이화백의 이북 공산당에 대한 비밀 암호였던 편지를 대서 해주기 위해 불란서까지 갔던가요.
간첩을 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 조국의 최고학부에서 처녀의 정열을 바쳤다는 말입니까.(중략)』
당시 논고를 끝낸 이 부장검사는『사람보다 그들의 죄가 야속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법무부 송무 담당관으로 승진한 정구영검사의「보석부인사건」(74년)논고문은 사치와 허영에 들뜬 부유층 여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명 정상론으로 기록된다.
『피고인들이 누려온 쾌감만큼의 불쾌감, 이익만큼의 불이익을 주는 것이 공정하고 형평에 맞는 법의적용』이라는 응보형적 정상론으로 유명한 이 논고는 검소·검약을 요구하는 국가적 현실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명문이라고 명한다.
『교사는 국민의 사표이자 학생의 거울입니다. 교육의 중추적 역할인 교사들이 자격증을 얻기 위해 범죄행위까지 서슴치 않고 자행한 것은 그들이 평소부터 지니고있는 양심의 수준과 인간으로서의 됨됨이를 짐작케 합니다. 암시강의 장사치들이 웃돈을 걸고 품귀물건을 차지하려는 파렴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고 지적했던 김도언 검사(대검검찰연구관)의 「교사자격증부정발급사건」 논고 중 정상론은 당시 교육계 인사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한 채찍이라고 말하고있다.

<검찰의 별-대검 검사>
청운의 뜻을 품고 검찰에 투신한 법학도라면 누구나 대검검사(검사장급)를 향해 달린다. 본청의 보직은 검찰총장을 보좌하는 스태프의 기능을 갖고있고 일선검찰청에서는 검사장으로 지휘관인 샘이다.
행정부의 차관급, 법원의 고법부장 판사급으로 1급 대우를 받는 지검부장· 차장에서 대검검사가 되면 승용차가 코티나에서 레코드 로열로 바뀌고 정보비·판공비를 합쳐 50만원을 더 받게 된다.
4급의 비서를 둘 수 있으며 자신의 업무를 보좌하는 검찰연구관(고등검찰관 또는 검찰관)을 최고 2명까지 둘 수 있다.
검찰 조직법상 대검검사 자리는 31석으로 검찰의 최고사령탑인 검찰총장 석으로 진군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할 이정표.
이는 최근에 와서 정석처럼 되었지만 과거엔 한격만(4대) 장형순(9대) 신직수(11대) 씨처럼 대검검사를 안 거치고 총장이 된 인사들도 있다. 한 총장은 대법관에서 전임했고, 장 총장은 육군본부 검찰과장이던 현역 대령 때 됐으며 신 총장은 변호사·중석차장을 거쳐 전입한 「케이스」.
총장 최장수로는 7년6개월을 재직한 신직수, 최 단명으로는 각각 10개월을 재임했던 민복기(5대) 정창석(6대) 김종경(16대)씨 등 3명이다.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 지검장에는 신임 김석휘 검사장을 빼고 22명이 거쳤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대검검사를 지내던 사람이 내무·국방·보사 등 정부 주요행정부처에 차관으로 승진,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 김장섭씨(내무·농림) 최세황씨(국방) 이경호씨(국방·교통·보사) 등이 차관을 역임했고 한때 국방차관은 『으례껏 가는 곳』으로 되어있었으나 L모씨이후 단절되었다.

<8만5천명에 한명 꼴>
근년에 들어 검찰이 그 기능과 이미지 면에서 일반으로부터 다소의 불신을 사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이 조직이 갖는 내재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검찰은 본래 준 사법적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검사 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검사 개개인이 검찰권을 행사하게 되어있나 직제상 철처한 상명하복의 관계에 있어 모든 사건처리에 그 내재적 한계를 극복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에 질적으로 지능화하고 양적으로 불어나는 범죄에 일손마저 달려 범죄척결과 사회기강확립에 기대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데도 원인이 있다.
검사의 부족이나 이직 현상은 그 수에 있어 법관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나 일손이 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지검 검사 한 사람이 한 달에 처리하는 사건건수는 2백40여건으로 일본의 1백여 건 보다 두 배가 넘으며 인구비례로는 우리가 인구8만5천명에 검사1명인데 비해 일본은 5만 명에 한 명 꼴이다.
검사수의 증원과 함께 업무개선방안이 시급히 연구되어야겠다. <고정웅·권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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