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프란치스코식 세월호 탈출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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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논설주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나고 아흐레가 지났다. 많은 사람이 그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한다. 그는 세월호 유족을 닷새 동안 다섯 번 만났다. “세월호 유족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했다. 딸을 잃고 단식 중인 유민이 아빠의 두 손을 잡고 위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45일째 단식 중인 그를 만나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청와대에서 유가족을 면담하면서 “진상 규명에 유족 여러분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며 “기회가 되면 또 뵙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때의 약속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자식이 수장(水葬)되는 비극을 겪은 유가족에게 필요한 건 차가운 논리가 아니라 위로다. 이들은 교황이 자신들을 만나준 데 대해 “참사 넉 달 만에 처음으로 존중받는 느낌이었다”며 흐느꼈다. 반면 여당에 대해선 ‘적(敵)’이라고 불렀다. 법과 논리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상황이다. 야당은 여당과 합의한 재협상안을 걷어차고 투쟁을 선언했다. 무책임하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까지 달라는 유가족의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무리한 게 사실이다. 불신이 분노를 낳고 있다.

 분노를 화해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대통령이다. 냉정한 머리가 아닌 따뜻한 가슴으로 풀어야 한다.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딸을 잃은 아비의 손을 잡고 위로해야 한다. 그저 “진상 규명에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던 5월의 약속을 지키겠다고만 하면 된다. 원칙을 양보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광화문을 가득 채운 불신과 분노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여당이 통 크게 양보한 재협상안을 들고 유가족을 설득하는 대신 단식 대열에 합류한 문재인 의원에게도 압박이 될 것이다. 세월호를 넘어 경제를 살리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사람들은 그가 낮은 곳으로 향한다고 한다. 나는 그가 아예 스스로를 비웠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티칸의 호화로운 관저를 거부하고 19세기의 호스피스 병동이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나그네처럼 산다. 인간의 삶이 잠시 머물다 가는 유한성의 숙명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즉 색(色)의 궁극적 실체가 실은 공(空)임을 매 순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심(發心)하는 빈 공간이야말로 프란치스코의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왜 우리에겐 공감과 위로의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가. 사실 지도자를 키우기에는 우리의 힘이 부쳤다. 옆도 안 보고 달리다 보니 사익(私益)의 경계를 뛰어넘어 크고 작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없었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4, 5년에 한 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일에 투표하면 끝이었고, 나머지는 정치인의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키워야 할 정치인을 분별할 힘도 잃어버렸다. 뜻있는 정치인들은 특히 억울할 것이다.

 이런 후진성은 일제 식민지 지배와 분단, 냉전이 지배해온 한국 현대사의 병통(病痛)이다. 식민지는 나의 문제를 나의 눈으로 보는 능력을 거세했다. 전쟁과 장기간의 분단, 냉전은 현실에 참여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불행한 경험을 남겼다.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의 성장이 더뎌진 이유다. 절제되지 않은 탐욕의 세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정글, 이게 21세기 한국의 자화상이다.

 세월호와 병영폭력, 지도층의 음란행위는 끝내 양지로 나오지 못한 시민의식이 부패하면서 퍼져나간 전염병이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에 졸업했어야 할 병영폭력은 2만6000달러 시대에 우리의 자식들을 괴롭힌다. 1만 달러 시대에 짰어야 할 복지국가의 틀도 여전히 미완의 상태다. 그 결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의 생명 경시 사회다.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이 세월호에 갇혀 희생돼도 공동체가 인간 중심의 가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경제학자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치인에게 속지 않으려면 정치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정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내는 정치풍토를 바꾸고 성숙한 지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정치혐오주의는 나쁜 정치인이 활개치도록 도와주는 최선의 장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겐 의무”라고 말했다. 국가에 다 맡기고 팔짱만 끼고 있을 것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시민성을 확립해 인간 중심의 가치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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