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의 대한편견 시정에 앞장" 37년만에 조국을 찾았던 김달수씨는 말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말 놀랐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지만 서울이고 농촌이고 너무 변했습니다.』김달수씨(61)-. 그는 지난 3월20일부터 27일까지 1주일간 37년만의 모국나들이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와 기자에게 이렇게 방한소감을 털어놓았다. 대표적 재일동포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작가이면서 종합잡지 「삼천리」의 편집인언 김씨는 한때 조총련의 골수분자였다. 다음은 김씨가 말하는 방한소감이다. <기록=신성순특파원>
내가 서울에 마지막으로 갔던 것은 해방전인 1943년5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였습니다. 그때 서울인구가 90만면이었습니다. 지금은 8백만명이나 되더군요.
도대체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습니다. 그전에는 참 어렵게들 살았거든요.
그런데 가보니 그게 아니 예요. 「중앙통」과 「부청」앞(세종로와 시청 앞)이 엄청나게 넓어지고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특히 한강변에 즐비한 고층주택단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잘살게 됐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더군요.
도시도 도시지만 농촌변화에는 더 놀랐습니다. 도로변에 보이는 붉고 푸른 지붕들이 「스위스」에 왔는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마이크로버스로 공주 부여 대전 광주 순천 진주, 그리고 고향인 창원을 거쳐 동해 우주 포항 울산 부산 등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일행 중의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변의 울긋불긋한 지붕이 「전시적인 것」인만큼 실제생활을 알려면 좀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고 아는 체 했지만 뒷골목을 뒤져보아도 받은 인상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국을 누비면서도 초가집은 단 두 채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새마을사업은 대성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고향인 경남창원을 떠난 것은 10세 때인 1930년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난에 찌든 고향풍경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변모한 고국의 모습을 보고서는 「우라시마·다로」(포도태낭=거북의 등에 타고 용궁에 갔다오니 세상이 완전히 변해있더라는 일본설화의 주인공)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고향마을도 크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생가는 기와집으로 바뀐 채 남아있었으나 친척은 한사람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고향마을의 대포집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돌아온 탕아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떠날 때 고향사람들에게 『다음에 올 때는 돼지잡고 막걸러나 하자』고 약속하여 겨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3월5일 비자를 받고 20일 비행기를 탈 때까지 2주일동안은 오랜만에 고국을 찾는다는 설렘에 잠을 설쳤습니다. 고국 땅을 밟고는 잠을 더 잘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2시까지 일행들과 그날보고 들은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새벽에는 시장바닥을 누볐습니다. 잠은 평균4시간도 못 잤지만 이상하게 졸리지도 않았습니다.
새벽부터 시장이 활기에 넘치고 물건이 많은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구경하기도 어렵던 밀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더 큰 감동을 느낀 것은 포항제철에 갔을 때였습니다. 일본이 2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 철강생산능력은 5백50만t이었습니다. 그런데 포철에서 8백50만t을 생산한다니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일하는 젊은이들이 일에 대한 확신에 차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한국을 다시 찾기 전에는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사느냐하는 것이 가장 궁금했어요.
막상 활기에 찬 국민들의 모습을 보고는 그 활력과 다양성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예산의 3분의1을 국방비에 쓰고도 그처럼 건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제까지 일본에 살면서 생각하고 있던 한국에 대한 나의 인식에 잘못된 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어요.
추상적·관념적인 생각만으로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그 잘못을 깨달은 지금 「용서해 주신다면」이제부터라도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치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고국방문에서 돌아오자 일본의 친구나 독자들 중에는 『억류되지 않고 돌아와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된 데는 나 스스로에게 책임이 많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종종 한국을 방문하여 변한 조국의 모습과 한국민중이 꾸준히 일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요.
이미 모 잡지사에 한국에 대한 기행문을 쓰기로 약속했으며 그 때문에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을 한번 더 다녀오고 싶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찾게된 것은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이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있는 재일 동포 5명의 구명을 탄원하기 의해서였어요.
그러나 이번 방문 길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일본의 천지들 중에는 박·전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 되니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한국에 가면 나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러 가는 일이고 나이 60이 넘은 처지에 몇 사람 떨어져 나가도 관계없다는 생각에서 방한을 결심했습니다.
갔다오니 일본의 대표적 역사소설가 「시바·료오따로」(사마료태낭)를 비롯, 많은 친구·친지들이 잘 다녀왔다고 격려해 주어 마음 든든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내가 KCIA(전 중앙정보부)에 매수됐다는 비방도 나오고 있지만 나 자신은 전혀 그런 말에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한때 조총련 골수분자였던 내가 그 조직을 떠난 것은 조직과 문학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총련의 전신인 조련(재일조선인연맹)의 창설 멤버였습니다. 조총련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신앙 같은 것까지 갖고 있을 경도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문학활동에 조직이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려 들어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됐습니다.
특히 김병식(남북한대화 때 조총련대표로 서울방문)이 부의장이 되고부터는 나를 종파분자로 몰아 붙이고 심한 박해를 했습니다. 72년5월에는 「교오또」(경도)부의 요청으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조차 이유 없이 못하도록 방해, 협박하고 20여명의 조직원을 나의 집에 보내 데모를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조국처럼 믿었던 조직이 박해를 가하다 못해 데모까지 시키고 나 자신의 생활조차 위협하려드는 것을 보고 나는 『이제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는가』하고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으며 결국 이 조직과 결별을 결심하게됐습니다.
문학은 비판적인 것이라야 하는데 조직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앞으로는 조총련이건 민단이건 조직에는 일체 관계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김일성의 초청으로 북괴를 방문할 기의도 있었으나 조총련 때문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북괴나 소련·중공 등의 공산체제와는 다릅니다.
특히 북괴는 「사이비공산주의」입니다. 어떻게 권력세습제를 할 수가 있습니까. 이제는 북한을 방문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