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들의 한국사관 달라졌다"|40년만에 서울에 온 재일 교포 김달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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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가 소설을 쓰고 고대사를 공부하게 된 것은 일본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이른바「좌경문화인」으로 활동하다 40여 년만에 모국을 찾은 계간지「삼천리」의 편집위원 김달수씨(62)는 21일 그가 소설과 역사를 공부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자신의 지나온 생활과 경력을 날 자까지 들어 소상하게 설명했다.
김씨가 처음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0년「사이따마겐」에 있는「고려 촌」을 답사한 때부터였으며 이곳에 남아 있는 옛 고구려 인들의 분위기가 자신의 한국 고대사 연구를 충동했다고 서두를 꺼냈다.
「고려 촌」에 대해 일본역사가 전하는 사료는「일본서기」및「속 일본서기」.여기에는 716년 고려인(고구려 인을 말함) 1천7백99명이 동경에 옮겨져「고려 군」을 이뤘다고 기록돼 있다.
김씨는 고대에 일본에 건너가 살았던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현존하는 일본인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유적을 직접 답사했으며 이를 토대로 1970년 책자를 발간, 일본인들의 한국고대사관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1919년 12월 27일 경남 창원군 의서 면에서 태어난 김씨는 1930년 겨울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오쿄」의「시나가와」역에 도착,「나까노」씨의 시『비 내리는「시나가와」역』을 읽은 것이 동기가 돼 자신도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곧 임원정소학교 4학년에 편입, 일본인들의 차별대우로 6학년 때 자퇴하고 염색공장·건전지공장·목욕탕 화 부 등의 잡역으로 전전했다.
1936년 김씨가 16세 되던 때「가나가와겐」「요꼬쓰까」시에서 토공으로 생계를 이어가며「와세다」대 강의록으로 공부했다.
1939년 일본대 전문 부 예술과에 입학,「신생작가」라는 동인지에 참여했고 다음해인 40년 처녀작인『위치』를 동인지에 발표했다.
41년 제2차 대전 발발로 앞당겨 대학을 졸업한 뒤 42년「가나가와」신문에 입사, 그해「문예춘추」에『진개』를 냈다. 그가 서울에 다시 온 것은 43년.
경성일보사에서 근무하며 서울생활을 1년 동안 하고 돌아가 그 경험을 토대로 장편소설 『후예의 가』를 냈으며 그해 김고순씨와 결혼했다.
45년 해방과 함께 조총련의 전신인「재일조선인연맹」결성에 참여했다.『후예의 가』가 「민주조선」에 연재됐던 것도 이때였다는 얘기다.
김씨는 이후「고국의 사람」「일본의 겨울」「밀항자」「태백산맥」등의 장편을 냄으로써 일본의 저명한 문인「시바료오따로」등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확보했고 최근에는『김달수 소설전집』(7권)을 내기도 했다.
김씨의 세계는「비판성」에 있다. 이 같은 비판적 태도와 사상은 조총련 등 북괴 당 지도부와 소위「미니·스탈린주의」의 압박을 받게 돼 5년 전 사실상 조총련을 탈퇴하고 사학관계 계간지인「삼천리」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고 그를 아는 사람은 말한다.
김씨는 얼마 전 NHK-TV에 출연,『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바 있고 그와 친한「시바료오따로」도『한국에 가기를 권유』하기도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진보적인 지식인이 한국에 다녀오면 일본 안에서의 생활발판을 잃게 된다는 걱정』때문에 소망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 37년만의 모국방문을 하게 됐다』는 얘기다. 김달수씨와 함께 모국을 방문중인 재일 동포 사학자 이진희(55·삼천리편집장), 강재언(56·동지 편집위원)씨는 21일 국사편찬위원회 회의실에서 국내사학·고고학자들과 좌담회를 갖고 일본에서의 한국사연구 현황과 경향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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