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사업 투자' 누가 먼저 꺼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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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유전 개발 사업 의혹과 관련, 야당과 철도공사가 10일 공방을 벌였다. 한나라당 진상조사단 권영세 의원이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사진 왼쪽). 이날 오후 왕영용 철도공사 사업개발본부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

한나라당이 10일 철도청(현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 사업 투자 의혹과 관련, 철도청의 내부 회의 문건을 공개하며 제기한 의혹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누가 철도청에 유전 사업을 처음 제의했는가이다. 또 이 과정에서 유전 사업의 보상 차원으로 북한산 건자재 채취 사업이 연관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나라당은 한 발 더 나아가 감사원이 진작 이 사건을 알고도 적당히 덮으려 했다는 의혹까지 내놓고 있다.

◆누가 철도청에 사업 제의했나=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지난해 8월 12일 왕영용 사업개발본부장은 사업 관련 회의에서 "유전 사업 참여 동기는 이 사업을 주도하는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에서 청(철도청의 약자)에 사업 참여를 제의한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적혀 있다.

당초 왕 본부장이 공식.비공식 석상에서 이 의원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신광순 당시 차장은 6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왕 본부장이 회의석상에서 갑자기 이 의원을 언급해 의아해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건교부 관계자도 "왕 본부장이 이 의원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는 철도청 관계자들이 여럿 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문건에는 내가 '외교안보위'라고 엉뚱하게 적혀 있는데 나는 산자위 소속"이라며 "정확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한 공격"이라고 반박했다. 국회에는 '외교안보위'라는 명칭이 없고, 이 의원은 '산업자원위'소속이다.

발언의 당사자인 왕 본부장은 이날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석유 전문가인 허문석 한국크루드오일 대표로부터 '이 의원이 이런(석유사업) 부문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어 지난해 8월 중순 철도청 정책토론회에서 '이광재 의원이 이번 사업에 관한 제언을 줬다'고 얘기했던 것이 일파만파로 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사업성 등에 대해 논의했는데 회의가 끝난 뒤 말미에 자연스럽게 그 말을 언급했을 뿐 이것을 (서기가) 속기록에 써넣을 줄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광재 의원을 처음 만난 시기에 대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난해 9월 중순에서 말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가 조금 뒤 "감사원 조사를 통해 알려진 대로 지난해 10월 중순에서 말 사이가 맞다"고 정정했다.

◆북한 건자재 채취 사업=문건에는 또 왕 본부장이 "(석유 사업에서 빚어질 우려가 있는) 리스크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북한 건자재 채취 사업 참여를 역제의한 상태"라고 언급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의원은 "사할린 유전 사업은 러시아와 관련된 사업인데 반대급부로 북한 건자재 사업을 받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느냐"며 "러시아와 북한이 같은 정부냐"고 따졌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 골재 채취 사업은 북한과 계약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별 이익도 나지 않는 사업"이라며 "유전 사업과 관련돼 논의할 만한 건이 아니다"라고 했다.

왕 본부장은 이와 관련, "예성강 골재 사업은 허문석 박사가 개인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유전 사업의 리스크를 감당못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허 박사에게 얘기하자 허 박사가 '내가 추진하는 북한 건자재사업이 있는데, 만의 하나 (유전 사업이)리스크로 실패하면 이것(북한 건자재 사업)으로 보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신광순 철도공사 사장은 "당시 왕 본부장이 예성강 골재 채취 사업에 대해 얘기한 것은 맞지만 그 이후 사업이 추진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왕 본부장이 제안한 골재 채취 사업이 아니라 골재 수송 사업이 통일부의 제안에 따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감사원이 조사 중단했었나=한나라당은 이날 공개한 문건에서 감사원이 우리은행 측에 "귀 은행에서 코리아쿠르드오일로부터 러시아 유전 및 정유회사인 페드로사 인수를 위한 외화 차입을 요청받고 2004년 10월 4일 계약금 620만 달러를 대출, 지급한 바 이에 대한 관련 서류 사본 일체를 2004년 12월 1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한 사실을 들며 감사원의 고의적인 감사 지연 의혹을 제시했다.

권영세 한나라당 의원은 "이는 감사원이 이미 지난해 11월 이번 사건에 대한 의혹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번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뒤늦게 감사에 착수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당초 지난해 12월에 감사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지난해 11월 20일께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12월 1일 우리은행 등을 상대로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며 "그러나 우선은 철도청이 러시아에 지급한 계약금을 돌려받는 게 국익에 중요하다고 판단해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계약금 반환 협상차 러시아에 출장갔던 왕 본부장이 귀국한 후인 2월 28일부터 본격 조사에 착수했다"며 "이는 언론에 사실이 알려지기 훨씬 전"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감사원의 이 같은 해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6일 오정희 감사원 사무총장은 이번 사건 조사에 대한 중간 브리핑에서 "본격적인 내사는 2월 중순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해 11월 철도청의 계약 파기 소식이 감사원에 접수돼 감사원이 이곳저곳을 조사한 것으로 안다"며 "그러나 감사원이 정식으로 감사에 착수한 것은 최근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쟁점=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은 또 "유전 사업은 하이앤드사와 석유공사가 공동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지분율 다툼으로 석유공사가 불참을 표명했다"는 왕 본부장의 발언 내용을 담고 있다. 석유공사는 그동안 러시아 유전 사업 포기 이유로 '사업성이 없다'는 것을 들었었다. 이에 대해 석유공사의 최재수 홍보실장은 '지분율 다툼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며 "공사가 자체 평가를 통해 사업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참가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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