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고대〃미이라|무엇 때문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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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인류최고의 「미이라」가 중공에서 발견돼 세계의 이목을 끌고있다. 6천4백70년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미이라」는 피부에 탄력성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 과학자들은『누란의 소녀』라고 명명하고 활발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미이라」는 어떻게 형성되며 고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미이라」는 인공적으로 만든것과 자연조건에 의해 우연히 형성되는것 두가지가 있다.
고대「이집트」에서는 건조하고 뜨거운 사막에 의해 자연「미이라」가 많이 생겼다. 이를 본 사람들사이에 염원불멸의 내세사상이 일찍부터 싹터 인공「미이라」가 성행하게 되었다.
즉「미이라」를 만듦으로 언젠가는 육체를 떠난 영혼이 되돌아 올때를 대비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약4천7백년전인 기원전2천7백년 「이집트」제3왕조말부터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미이라」를 만드는 풍습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조법은 유체의 내장을 꺼낸다음 나무진을 먹인 아마포로 유체를 감아 자연건조시키는 방법을 썼다.
제거된 내장은 별도로 단지에 보관됐다.
기원전 2천년전쯤인 제11왕조때에는 탄산「나트륨」으로 수분을 제거시키는 방법이 개발됐다.
가장 완벽한 「미이라」가 제조되기 시작한 것은 제18왕조(기원전1800년) 때부터. 제조법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갈고리를 양귀를 통해 뇌에 집어넣어 뇌수를 꺼낸 다음, 약품으로 머리속을 처리한다.
내장은 날카로운 돌칼로 왼쪽 옆구리를 절개해 제거하고 속은 야자유로 깨끗이 씻는다.
다음, 빈 복강속에 향료·나무진·계피등을 채워놓고 봉한다. 이것을 천연 탄산「소다」분말속에 묻어 수분을 뺀다.
수분이 빠지면 전신을 아마포로 감싼뒤 일종의 고무액을 발라 굳힌다.
이 작업은 70일간에걸쳐 행해진다. 완성한「미이라」는 목관속에 넣어 묘실벽에 세워진다.
21,22왕조(기원전 1천여년)때는 얼굴에 화장을 시키고 의안을 집어넣는 등 다양해졌다. 이것은 혼이 자기의 육체를 손쉽게 찾게하기 위해서였다.
이런「미이라」제조법은 방법이 정교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고 「로마」시대를 거치면서「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3세기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독특한 「미이라」제조로는 「뉴기니아」·「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체를 나뭇잎으로 싸서 7∼10일간 진한 연기를 쐬는 훈제법,「잉카」제국의 내장을 꺼낸뒤 천연건조시키는 법등이 있으나 극히 미미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자는 다시 부활한다는 재상사상이 확립되지앉아「미이라」를 만드는풍속이 없었다.
지난 68년, 73년에 국내에서 발견된 조선시대의「미이라」는사체가 석회와 목관으로 밀폐되어「미이라」화한 것으로 보존상태가 아주 불량하다.
이번 중공에서 발견된「미이라」는 중국 동북방 신강지구의 건조기후와 지형적조건으로 습기와 세균의 침입이 불가능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6천4백여년전에 과연「미이라」처리나 방부제사용의 능력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진게 없다.
서울대 김용원교수는『그보다 훨씬 후대에 내려와 중앙「아시아」에서 지배자를「미이라」로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말하고 『이번 중공의 소녀「미이라」는 사막의 고온건조한 기후로 자연「미이라」가 됐을것으로 본다』고 추측했다.
오늘날까지도 목적은 다르지만「미이라」제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중공의 모택동 소련의「레닌」,「케네디」등은 방부처리가 돼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현대판「미이라」가된셈이다.
「미이라」의 가장 큰 가치는 당시의 사람이라는데에 있는데 체질인류학으로 많은 새로운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미이라」자체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체격·체질·식생활·영양상태·질병관계등이 있다. 함께 묻은 부장품에서는 당시의 문화가 소상히 알려진다.
더욱「미이라」는 죽음의 의식을 치른후 형성되는 것이므로 사망시의 사회상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고대인의「죽음의 의식」은 사망자의 나이·성별·친족관계·지위·직업에 따라 달리 행하여지기 때문에 하나의「미이라」속에는 그러한 모든것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장지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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