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것 있다…의심나 안가|30분간 실랑이 악수하고 헤질 땐 화내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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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동생 윤상이 유괴당하기 한달 전인 지난해 10월13일 하오4시부터 5시30분사이.
7교시가 끝난 휴식시간에 친구 송모양(15)으로부터 『복도에 선배언니가 기다린다』는 전갈을 받고 나가보니 18세 전후의 서울여고 교복을 입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나에게 이름과 주소·아버지 이름등을 확인하고나서 『전해줄 물건이 있어 왔는데 딴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내가 『보충수업이 남았으니 방과후 매점에서 만나자『고 대답하자 그 여자는 『매점이 어디있는지 모르니 교실옆 수도가에서 만나자』고 고집하며 자기는 서울여고 학생이 아니라고 밝혔다.
학생도 아니면서 교복을 입고 나를 찾는 여자가 수상히 여겨져 방과후 친구 2명에게 수도에서 손을 씻는 체하며 감시하도록 부탁하고 약속된 장소를 나갔다.
수도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추워서 얘기를 못하겠으니 빵집으로 가자』고 요구, 싫다고 하자 『우리집이 여기서 5분 거리에 있으니 금방가서 물건을 가져가라』고 졸랐다.
여자는 자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친구인데 출장갔기 때문에 자기가 대신 물건을 전해주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중요한 물건이니 꼭 가져가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시간이 늦어 집에는 갈수 없으니 물건을 직접 아버지가계에 전해주라고 말했으나 여자는 가계를 찾지못해 학교까지 왔다며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갔다오자고 말했다.
여자와 30여분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오늘 밤 7시에 엄마와 함께 교문앞에 나올테니 그때 물건을 전해달라』며 가려고 하자 여자는 『시험중이니 시간이 없다』며 『너처럼 의심이 많은 아이는 처음 본다』고 화를 냈다.
계속 이상한 생각이들어 『집에가서 아버지한테 이야기할테니 누군지 말해달라』고 묻자 그 여자는 『영진산업 김성천』이라고 대답한후 『내일6시 교문앞에서 만나자』며 악수를 청하고 헤어졌다.
나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 여자는 입술이 타는 듯 계속 입술에 침을 바르며 초조해했고 악수할 때 손바닥엔 땀이 축축히 배어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여자의 옷차람은 새로 마춘듯한 서울여고 교복에 학교「비지」가 달려있지 않았고 상의는 학생답지 않게 「타이트」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또 갸름하고 예쁜 얼굴에 갈색테의 안경을 썼고 입술이 얄팍해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나는 여자가 우리집안사정을 너무 잘 알고 학생이 아니라면서도 교복을 입고 나타나 물건을 준다고 하는등 말의 앞뒤가 틀려 의식적으로 피했으나 유괴의 대상이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으나 모두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만 했으며 동생 윤상이에겐 『너는 오락장에 가자고 하면 그냥 따라갈 애야』라는 등의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지금생각하니 이 사건을 전후에 20대여자와 40대남자가 아버지를 찾는 전화를 2차례 걸어온 것이 생각난다.
첫 번째 전화는 10월11일 하오4시쯤에 걸려온 것으로 내가 전화를 받자 20대 여자가 『아빠를 바꿔달라』고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전화를 건 여자는 『누군지 상관말고 하여튼 바꿔달라』며 화를 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전화를 잘못 건 것 같다. 우리 아버지 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자는 『이씨지 무엇이냐. 장난하는거냐』고 말했다.
여자는 『지난번에 아빠랑 만났던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전해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전화의 목소리가 내동생 윤상이가 납치된 후 범인들의 요구에 따라 11월20일 돈을 가지고 서울종로2가 고려당에 나갔을 때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또 한통의 전화는 유괴 미수사건 하루뒤인 10월14일 하오6시쯤 굵은목소리의 남자로부터 걸려왔다. 친척인 이복선아주머니(40)가 전화를 받자 전화속의 남자는 대뜸 『이사장을 바꿔달라』고 요구, 이씨아주머니가 『누구냐』고 묻자 『사모님이냐. 당신은 알필요없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이들이 모두 우리들을 노린 유괴범인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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