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와 붓을 씻으며 매화 피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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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느 겨울보다 지루한 추위와 심한 눈이 내려 북극을 연상케 하더니 대자연의 원칙은 변함없어 입춘이 지났다. 이제 나의 작은 화실에도 봄은 올 모양이다. 벼루도 씻고 붓도 씻어 화구를 정리해두며 화실 창밖에 매화가 피고 진달래 피기를 기다린다. 친구가 연전에 동경서 사다준 양모 새 붓으로 진달래꽃이 지기 전에 멋있는 그림을 완성하고픈 욕심이지만, 과연 꿈을 이룰는지….
봄이 오면 나에겐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 바로 난초를 꽃피우는 일이다. 나는 난초를 십년 간이나 사랑하였으나 고귀하고 까다로 와서 비위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중국 어느 산골짜기에 물 흐르고 새 우는 고향이 그리워서인지, 도시에 오염된 공기와 냄새나는 수도 물이 싫은지, 아니면 제 살던 산에서 신선만 상대하다가 나 같은 속인이 싫은 까닭인지 항상 말없이 수심에 차 있다가 누렇게 말라서 죽어버리곤 한다. 병명을 모르니 더욱 안타깝고 섭섭하고 미안하기까지 하다.
3년 전에 친우 하나가 난초 2분을 보내왔다. 단단한 각오로 정성을 다해 비위를 맞추어 작년에 새촉 두 셋이 각각 올라왔다. 잎도 마르지 않고 반점도 없이 잎선이 날씬한 게 여간 예쁘지 않다. 난초 꽃이 피면 친구를 청하여 한잔 할 생각으로 있었는데 내가 술 먹는 것이 싫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꽃이 피지 않는다. 만일 봄과 더불어 난초 꽃이 핀다면 나의 작은 화실에는 난초향기가 가득 차 대경사가 아닐 수 없겠다. <글·그림 성재휴 <동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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