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잡히는 시상을 찾아 겨울 시골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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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주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강원도 행을 서둘렀다고 강물이 녹기 전에 찾아가야 할 곳이 있었는데 거리의 언 땅이 별안간 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음이 녹아서 놀란 건 개구리만이 아닌 모양이다.
춘천에서 가정리행 완행「버스」에 오른 것이 4시 좀 못 미쳐서였고 마곡리에 닿은 것은 6시가 좀 넘어서였다. 「버스」는 시간을 맞추어 출발한다기보다 탈 사람이 다 타면 간다는 투로 떠났고, 또 내릴 사람과 탈 사람이 있으면 어디서나 정차한다는 투로 운행되고 있었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겠지만 지리에 어두운 초행길에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세워주세요』하는 여자목소리에 거가 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일도 있었으니까.
그 여자는 그제야 사람과 짐을 헤쳐 나와 무사히 하차했다.
그 때 『인심 좋지요』하고 옆자리에서 말을 건네 와서 나는 그런 일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자신의 시선을 새삼 깨달으며 약간 겸연쩍게 웃고 동조했다.
길도 미끄러웠지만 그 후한 인심 때문에 예정시간보다 삼십분이나 늦게 목적지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
산에는 그늘진 주름마다 눈이 아직 짙게 남아 있었다. 재를 넘으면서 전나무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오대산 월정사 근방에서 눈에 익혀두었던 나무들이다.
가다보면 벌거숭이 나무둥치들을 무더기로 서로 기대어 세워놓고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었다. 참나무를 베어내고 껍질을 벗겨서 물을 뿌려주면 버섯이 자라는데 언제까지나 자라는게 아니어서 나무는 마침내 땔감으로 쓰인다는 것이었다. 그 친절한 중년신사가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미처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사실은 그밖에도 있었다.
골짜기 논에는 거둬들이지 않은 채로 버려 둔 벼들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무색하게 서 있었다. 끝내 낟알이 패지 않아서 추수를 하지 못했다 한다. 농사일을 잘은 몰라도 섬뜩했다.
그 뿐인가. 흉년이 계속하는 바람에 도시로 가는 사람들이 불어서 어쩌다 보면 빈집들이 있다고도 했다.
한편 개량 식수가 성행해서 어린 잣나무들이 가는 곳마다 자라고 있는 것이 보기에 흐뭇했다.
나는 그 친절한 목사님에게 귀를 맡긴 채 산과 나무와 하늘밖엔 별로 볼 것이 없는 차창 밖을 짐짓 내다보면서 문득 시인 M의 말을 되살렸다. 장로급 시인 M은 별스럽게 꼬집을 것이 없는 바로 그것이 강원도의 특색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뜻은 10년도 넘어 되는 동안세월의 앙금으로 가라앉았다가 이제 되살아온 것이리라. 그때 그분은 좀 쉬고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시를 쓰는 일을 쉬는 일처럼 해야한다고 되뇌곤 했다.
시상의 꼬리가 잡힐 듯 안 잡혀서 내친 나들이 길이기는 했으나 막상 떠나고 보니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눈과 귀로, 그리고 머리와 가슴으로 강원도 산길에 접어들면서도 진작 궁금한 것은 강물의 녹지 않았을까, 건너가는 도중에 얼음이 갈라지지나 않을까.
나는 참아가며 물었지만 내 속을 꿰뚫었던지 『건너가는 사람이 많다』느니 『사람 뒤를 따라가라』느니 거듭 말했다. 이래도 못미더웠던지 내 뒤를 따라 내려서 동행할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마을 사람들도 그날 하룻 사이에 얼음이 많이 녹았다면서 잠시 강기슭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윽고 대기하고 있었던 빈「리어카」에 정부미 자루들과 커다란 봇짐 몇을 싣고는 남자 하나가 끌고 아낙네 셋이 밀며 갔다. 뒤처질세라 따라 붙는데 이건 또 웬일로 오른 발의 발가락 하나가 힘만 주면 아파서 마음대로 걸리지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발 밑에서 빠지직 소리를 내던 것은 얼음이 아니라 겨우내 쌓였던 눈이었음을 안 것은 귀로에서 였다. 앞서가던 사람들은 나는 듯이 건너가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때 내겐 바가지 쪽을 엎어놓은 것 같은 수리재의 모습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돌아올 때 「버스」를 한시간 남짓 기다리면서 개구리처럼 놀라서 두리번거리던 자신을 돌이켜 보기로 하고, 멀리 가까이에서 나는 가만가만한 소리에 귀를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일기장에 썼다.
『북한강 상류의 강기슭은/얼어 있어도 은옥 빛. /흰 눈은 그 위에 쌓여서/ 얼었다 녹았다 하며 봄을 기다리는데/ 나는 일「미터」두께의 얼음장을 건너면서 발가락에 쥐가 난다./ 강은 깊은데서/ 소리를 죽여가며 흐르고/ 얼음은 가만가만 소리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신동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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