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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거북 등 같은 초가집 기와집과도 안 바꿔|남제주군 표선면 성읍「초가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현무암 돌담을 따라 거북이 등 같은 초가지붕이 물결을 이룬다. 동아줄 만한「줄비엉」(새끼줄)을 가로 세로 엮어 해풍을 견디게 한 지붕은 산촌 초가에선 보기 힘든 야무진 가꿈새다.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초가보존마을」.
마을가옥 2백61채 가운데 1백87채가 초가. 지은지 1백년이 넘은게 80채,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이 5채나 되어 탐라 남국의 옛 주거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초가는 집의 시발이자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기와집처럼 날카롭거나 모나지 않고 둥그스럼한 지붕은 구수하고 은은하다. 반짝이지 않고 천연스러워 좋다.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 춥지 않아 더욱 좋다.
초가집은 일자형과 ㄱ자형이 있으나 제주도 초가는 모두가 일자형에 남향받이다. 들보도 내륙지방의 다섯줄(오량가)보다 두줄이 많고(칠량가) 4간짜리가 대부분.
삼다 중 바람이 첫째인 만큼 방풍이 집 짓는데 첫째다. 한라산에서 나는 굵은 참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도리건너 지르고 대들보를 받쳐 서까래를 건 뒤 널빤지로 벽을 친다. 그 위에 널찍널찍한 돌을 반듯반듯하게 깨서 돌담을 쌓고 그 사이에 진흙을 개어 바른 것이 바로 제주 초가의 토벽이다.
집 구조는 맨 오른쪽 칸이 부엌, 다음 칸은 둘로 쪼개 앞쪽이 작은 마루, 뒤쪽은 작은 방이다. 다음 칸은 큰 마루, 그리고 맨 왼쪽 앞 칸에 큰방이 배치되고 뒤쪽에 고방을 두었다. 따로 굴뚝이 없어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는 부엌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되어있다.
앞뜰과 뒤뜰 사이는 돌담으로 막아 마루나 부엌을 통해야만 앞 뒤뜰을 다닐 수 있다. 여름밤 앞마당에서 남정네들의 마실 모임이 있어도 아낙들은 마음놓고 뒤뜰에서 목욕을 할 수 있다.
동네 골목에서 집 마당까지의 길을 이곳에선「올래」라고 부른다. 이 길은 직각으로 굽어있어 문간에서 안채 쪽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말하는「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어있다고.
원래 이 마을은 이조 세종5년(1423년)부터 일제하의 1914년까지 정의현 소재지.
다른 마을에 비해 관리·유생이 많았기 때문에 제주도 고유 양식대로 격을 갖추어 초가집을 지었다.
『한라산에서 아름드리 참나무를 잘라 10여 마리의 소를 동원하여 실어왔지.』
이 마을 최고령자 송원준옹(83)은 집 한 채를 지을 때마다 마을 장정들이 모두 나섰다고 한다.
초가 한 채에 드는 볏단은 2백단. 내륙 산간의 초가도 1백50단이면 충분한데 2백만씩 들었다니 깊고 두터움이 짐작간다. 입춘을 전후하여 40∼50일 걸려 집을 짓고 나면 온 동네 주민이 모여 돼지·닭을 잡아 축제를 벌인다.
지금까지 초가집이 잘 보존된 것은 천연적인 잇점과 마을주민들의 노력이 겹쳤기 때문.
이 마을은 제주산(해발3백24m) 남산봉(2백30m) 장자오름(2백15m) 갑선이오름(1백83m)등 산과 구름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옛 어른들은 길이 2.3㎞, 높이 3m의 돌 성을 쌓아 이 마을을 요새처럼 만들었다.
때문에 제주도의 대부분 지역이 왜구의 침략질을 당해도 이 마을엔 왜구들이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48년「4·3폭동사건」때도 한라산에 본거지를 둔 공비들이 이 마을을 몇 차례 공격했으나 마을주민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성곽을 넘지 못했다.
『3일 동안 계속 대치한 적도 있었지. 마을 주민들은 성곽을 이용, 공비들과 총격전을 벌였어. 놈들은 결국 성곽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고 성곽 밖에 있는 집들만 불태운 뒤 물러갔지.』
송옹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 당시 주민들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70년대 들어 지붕개량사업이 한창일 때도 주민들의 반대로 초가를 지켰다. 3백 가구 1천4백명이 2백50정보의 밭을 일궈 고구마·유채를 심어 먹고 소 7백50마리, 돼지 2백20마리를 키우며 살고있다.
가구 당 연 평균소득은 2백여 만원으로 비교적 가난한 편. 그러나 마을이 민속촌으로 지정(78년)된데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기와집처럼 번잡하지 않고 청판석집 처럼 요란스럽지 않지요. 깊고 은은한 가운데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지혜가 곁들인게 우리 섬의 초가집입니다』. 이장 조정웅씨(40)는 살아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고 한다.
서민의 집, 초가지붕의 선에서 풍기는 경세의 뜻을 옛 권세가 들도 깊이 음미했는지 모른다.
권문세가의 대가 집도 후정 한가운데 초가 한 채를 세운 것이 단순한 풍류만은 아닌 것 같다. 【제주=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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