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인정|오태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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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 겨울은 눈이 많고 한참 춥다. 이런 겨울을 실감하자면 우리 시골 넉배재의, 사람을 줄 끊긴 연처럼 냅다 뒤집어버리는 마파람을 맞아봐야 된다.
잿길 꼭대기 참호처럼 깊게 맨 고랑창에 잠깐 기대어 숨을 돌리면서 재 너머 두마장 길을 내려갈 생각을 하면 사지로 구른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어디가 길이고 고랑창이고 분별할 수도 없거니와, 바로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등으로 어디만큼 가다가 힐끗 앞을 내다보고서 등으로 밀고 나가는 마당이니 살피고 어쩌고 경황도 없다. 그러다가 고랑창에 빠지면 사지. 말 그대로 널판지 밑이 저승인 것이다.
지난번 여고생 둘이 얼어붙었다던 재도 아마 넉배재 같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재를 넘어가는 요령이 있기는 있다. 「궁둥이에 채찍을 느낀 말」처럼 냅다 달려버리면 된다. 바람이 자는 재 밑에까지 숨이 끊어지라고 치닫는 것이다.
수년전 구정에, 큰집에서 차례 지내고 오던 부자가 얼어 붙어버린 재도 넉배재 같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국민학생이던 아들은 냅다 달리는 요령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피난 국민학교 3년 동안에 넉배재를 겪으면서 배운 요령이다.
그런데 이 아들은 냅다 달리지를 않고 고랑에 쓰러진 아버지를 덮어주며 함께 얼어붙어 버렸다. 가엾은 일이다.
같은 이치로 보자면 전번에 얼어붙은 여고생도 그중 하나는 냅다 달렸을는지도, 그런데 나머지 하나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달리던 하나가 돌아와 함께 얼어붙었는지도 모른다. 달리던 여고생은 돌아가지 말고, 아이도 아버지 위에 몸을 덮지 말고 그냥 달려서 구원을 청했더라면 하나쯤 구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넉배재에서는 지호지간에 닿는 인정은 죽음을 동반하기 십상이라는 말도 된다.
엊그제 경북 문경 지하 2천4백30m에 홀로 묻었던 이옥철씨가 1백15시간만에 갑자기 땅위로 솟아올랐다.
-내가 죽으면 가족도 죽는다고 지상의 얼굴들을 헤아리면서 실로 구천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비행기 추락으로 사막에 홀로 버려졌던 「생·텍쥐페리」도 비슷한 소리를 지르고서 돌아왔다.
-저기 「파리」의 불 밑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하의 이옥철씨나 사막의 「생·텍줘페리」를 사지에서 끌어낸 것도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넉배재의 손에 닿는 인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도달할 길 없는 곳에 있는 인정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정이란 가깝게만 작용해서 해로울 수도 있고 멀게 작용해서 은혜로운 것일 수도 있는가 보다.
인정이란 인간이 인간한테 가지는 정감일진대, 손닿는 것과 먼 것에 차이가 있을리 천만 없다. 그러나 올 겨울처럼 춥고 보면 손을 잡는 것만 인정이라고 여기기 쉽다.

<희곡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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