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의 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서화담은 개성문 밖에 초막을 짓고 세월을 잊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잊지 않는다고 그에게도 세모는 온다.
독서당일지경륜 세모환감안씨빈 책 읽으니 천하경륜 다 깨우쳐 세모에도 안빈악도 오히려 달가와…
서울 보다 훨씬 북쪽의 세모라면 여간 혹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추위를 모르자면 서경덕 만한 인물이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담이라 해도 세모에 아무 느낌이 없을 턱이 없었다. 그의 시는 계속된다.
…부귀는 시샘 많아 손대기 두렵고 임천에 숨어사니 시비 없어 몸도 편 쿠나.
산나물 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음풍영월하니 마음이 상쾌하도다.…
황진이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도통한 화담이기에 세모에 이처럼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속진에 연연하는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다.
더우기 날씨도 빙점이하의 추위다. 엊그제가 영하 13도, 어제도 14도, 오늘도 서울은 16도, 모든게 꽁꽁 얼어붙었다. 그래도 세모의 정근만은 얼려놓지 못하는가보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매듭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런게 세월이요 인생이다.
한번 지나가면 어느 것이나 또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서글픔이 앞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하루해, 날은 저물어
야속타 백년세월 가버리느니…단 하루가 저물어가도 한 수는 이렇게 서글퍼했다. 하물며 한해가 저무는 아쉬움을 달래는 길이 우리에게 흔하지가 않다.
좋든 나쁘든 한해로 사람 얼굴에는 주름이 하나 더 잡힌다. 역사의 연륜은 하나가 더 는다.
낙서라면 지울 수도 있다. 꿈이라면 다시 꿀 수도 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 남겨놓은 자국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웃음을 삼키고, 눈물을 씻기고, 은수를 물거품처럼 떠올리며 세월의 강물은 덧없이 흐른다. 그리고 역사의 빈 조각만이 남는다. 그러나 마냥 서글픔에만 잠겨 있을 때는 아니다. 비록 내 손으로 곱게 매듭을 짓지는 못했을망정 우리는 이제 한해를 보내는 것이다.
비록 1백8개의 번뇌를 그대로 안은 채 묵은해를 보낸다 해도 지나가는 한 해에 아쉬움은 없다.
묵은해가 가면 새해가 온다. 비록 새해에도 1백8개의 번뇌가 그대로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새해에는 꿈이 있고 새 희망이 있다.
그리고 온갖 격동과 고뇌로 찬 세월의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화담의 식견이 없이도 세모의 아쉬움을 웃어넘길 수도 있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