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님들 축구와 바람났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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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전북 무주리조트에 마련된 여성부장관배 전국여성축구대회 본부석.

장내 아나운서가 “출전 선수 확인 절차를 밟으라”고 방송을 했다. 간혹 프로 선수가 신분을 속여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단의 경상도 ‘아지매’들이 본부석으로 몰려들었다. 삿대질 섞어가며 버럭버럭 소리를 친다. 본부석 일대는 별안간 야단법석이 일었다.

“에고∼ 마, 그럼 우짜란 말인교? 기냥 돌아가란 말인교? ‘뽈’ 한번 못 차보고예? 그럴순 엄서예.”

아줌마들은 본부 관계자들을 붙잡고 통사정을 한다. 몇몇은 울먹거린다. 안되면 경기장에 드러눕기라도 할 기세다.

"여기가 동네 운동회입니까? 전국대회예요. 장관배 전국대회! 경기 규정에 나와 있잖아요. 여기 보세요. 신분증 필수 지참. 없으면 출전 불가. 억지쓰지 말고 돌아가세요."

"한번만 봐주이소. 우리가 처음이라서 그래예. 몰라서 그랬어예. 마산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어예. 불쌍하지도 않능교. 한번만 봐주이소, 예?"

실랑이는 좀체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이때, 장삼 자락 휘날리며 홀연히 등장한 스님 한 분이 계셨으니~.

"아지매들은 빠지소. 나, 삼학사 주지 영재스님(44)이오. 내가 부처님 앞에 맹세하오. 우리 팀엔 부정선수 같은 거 없소. 보시오, 죄다 아지매들이잖소. 눈에 보이는 걸 믿지 않고 무엇을 믿겠단 말이오. 관세음보살."

스님까지 나선 차에 대회본부도 원칙만을 고집할 순 없었다. 나중에 본부로 신분증을 보내는 조건으로 출전을 허락받았다. "규칙 위반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어진 본부 측의 답변. "어차피 첫 출전팀이라 결선에 오르지도 못할 거예요. 한번 뛰게라도 해줘야죠."

이로써 소란은 일단락됐다. 스님이 구단주 겸 감독이자 코치인 경남 마산 삼학사 여보살팀의 전국대회 첫 출전이 확정됐다. 아지매들은 우승이라도 한 양 좋아했다.

아지매들이 축구를 처음 접한 건 지난 해 초. 삼학사의 주지로 영재스님이 부임하면서다. 축구광인 스님은 "부처는 축구공에 계신다"고 공공연히 설파했다. 주부 신도에게도 "공에서 불심(佛心)을 찾아라"고 가르쳤다.

주지스님의 '신불법(新佛法)'에 아지매들은 감화됐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기로 했다. 지난해 4월의 일이다.

"조명이 없어 깜깜한 데서 공을 찼어예. 들어는 봤능교? '달밤의 축구'라고. 처음엔 많이 다쳤어예. 무릎도 까지고. 근데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는 거라예."

최고참 하재연(50)씨처럼 아지매들은 하나 둘 축구에 재미를 붙였다. 팀은 순식간에 22명으로 늘었다. 처음엔 "여편네가 웬 축구냐"며 뜨악했던 남편도 이젠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신랑이 제일 좋아합니더. 똥배가 쏙 빠졌다고예. 아예 개인코치가 됐습니더." 박필순(43)씨의 자랑이다.

'아지매 축구상봉기'가 한창 흥이 돋을 무렵 휘슬이 길게 울렸다. 삼학사 팀의 첫 공식 경기가 시작됐다.아지매들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불행히도 상대는 강력한 우승후보 경기도 고양시 여성축구단. 경기 내내 우왕좌왕하던 아지매들은 힘 한번 못 쓰고 3대0으로 졌다.

경기가 끝나자 영재스님이 고개 숙인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한다.

"괜찮다. 고양 아지매들은 살림도 안 하고 공만 찼나. 우째 그리 잘 하노? 우린 살림을 너무 열심히 하니까 축구에선 좀 딸려도 된다."

"전술은 따로 없냐"고 물었더니 옆 자리의 김영숙(44)씨가 끼어든다.

"시합 나온다고 이틀 전에 처음 축구 규칙을 배웠어에. 오프사이드란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예. 그딴 게 왜 있능교?"

예선 마지막 상대는 홈팀 전북 무주반딧불 축구단. 전반 10분쯤 문전 혼전 중에 삼학사 팀의 김영애(44) 선수가 골을 넣었다. 그대로 1대0 승리! 소감을 묻자 김선수의 질펀한 수다가 쏟아진다.

"너무 좋아서 준비했던 골 세리머니를 까먹었어예. 뭘 연습했었는지 아능교? 총각 기자가 알랑가 모르겠네. '출렁출렁' 춤이라고."

영재스님에게 물었다. "축구랑 불심이 어떤 관계가 있나요?"

"관계는 무슨. 내가 재미있으니까 그랬지. 보소, 아지매들 참 건강하지 않소? 공 차면서 땀 흘리는 거랑 찜질방에서 땀 빼는 거랑 같겠소? 난 부처님 말씀 잘 모르오. 신이 나서 뛰어다니면 그만 아니겠소."

삼학사 팀은 분전에도 불구하고 예선탈락했다. 경기를 끝마치고 아지매들은 축구장 한복판에 나와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아지매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4월의 봄볕 사이로 퍼져 나갔다.

무주=손민호 기자

<사진설명>
여성부장관배 전국 여성축구대회의 한 장면. 평생 축구의 '축'자도 모르고 살아왔던 아줌마들이 축구대회에 공식 출전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지만 경기는 시종 진지했다. [무주=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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