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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동학에서 맥주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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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29면

지난 7월 하순은 세계사적인 전쟁 기념일이 몰렸다. 25일은 청일전쟁(1894~95년) 발발 120주년, 28일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 개전(개전일이 국가별로 달라 기념일도 다르다) 100주년이었다. 27일은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61주년이자 갑오개혁 120주년이었다. 청일전쟁 120주년은 이를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戰爭)이라고 부르는 중국과 일청전쟁이라고 하는 일본에서 서로 큰 온도차를 보였다. 일본은 애써 모른 척했고 중국은 기억 증강을 시도했다. 중국은 전쟁기념일인 7월25일부터 당시 격전지였던 보하이 만과 서해 북부 해역에서 군사 훈련에 들어갔다. 한국에게 이 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여름날이었다.

청일전쟁은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맞붙은 첫 근대전쟁이다. 임진왜란의 재연 성격도 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을 시작하자 조선 정부가 6월1일 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전쟁의 실마리다. 청은 한반도 세력균형을 위한 톈진조약(1884년)에 따라 일본에 파병을 통보하고, 6월6일 2460명을 파병했다. 일본은 이틀 뒤 4500명의 군대를 인천에 보냈다.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7월27일 조선의 근대적 개혁인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이 개혁으로 노비 매매와 신분제가 사라지고 고문과 연좌제과거가 폐지됐다. 조혼이 금지됐고 과부 재가가 허용됐다.

그 동안 청과 일본은 7월25일 아산 앞바다의 풍도해전, 7월27일 성환전투를 벌이며 전쟁에 들어갔다. 공식 개전은 8월1일이었다. 이후 일본은 9월15~16일 평양전투, 9월17일 압록강 어귀의 황해해전을 벌이며 청군을 한반도에서 밀어내고 제해권도 장악했다. 11월21일엔 군사 요충지인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청일 양국은 이듬해 4월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냈다. 조약 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해치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조공·헌상·전례 등을 영원히 폐지한다”고 돼 있다. 일본 우익은 이를 두고 조선을 중국에서 독립시켰다는 허황된 주장을 한다. 그와는 달리 이는 중국 개입을 배제하고 일본이 맘 놓고 조선을 침략하는 길을 연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2, 3조는 일본이 청의 랴오둥(遼東) 반도, 대만, 펑후(澎湖)제도를 차지하고 4조는 청이 일본에 2억냥(청의 3년치 세입에 해당)의 배상금을 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일본의 만주 진출에 반발한 러시아가 영국·독일을 끌어들여 이른바 ‘3국 간섭’을 통해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병합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만주철도 부설권을, 독일은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를 각각 차지했다. 현지에서 1903년 독일인과 영국인이 생산을 시작한 칭다오 맥주는 현재 중국 최고의 맥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는 1차대전 초기 연합군인 영국과 일본이 칭다오 전투를 거쳐 점령했다. 당시 기항 중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함도 참전했다. 동아시아 유일의 1차대전 전투다. 전후 일본이 산둥을 차지하려 하자 중국인들이 들고 일어난 항일·민족운동이 5·4운동(1919년)이다. 두 달 앞섰던 3·1 운동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침략자에 맞섰던 조선 민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런 교훈으로 가득한 이 여름을 동아시아 3국의 역사적 자각과 후세 교육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고 지나는 게 못내 아쉽다. 더구나 그 틈바구니에 있는 한국에서 말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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