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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군과 국사 방위에 바친 일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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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육군의 거성이던 송요찬 장군. 뜻하지 않았던 송장군의 부음은 비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놀라움과 슬픔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겨레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거성은 갔지만 반공과 국토방위로 일평생을 바친 송장군의 공덕은 우리 나라 청사와 같이 용원히 빛날 것입니다.
1946년5월 군사영어학교를 마친 후 나라의 천성으로 공부수립직후인 제주도 4·3폭동사건 진압을 비롯하여 6·25동란 시에 헌병사령관으로 한국은행의 지금 괴를 안전하게 반출하여 국가경제의 위기를 구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후 건세가 악화되자 수도사단장으로 동부전선에서 용전 하여 많은 북괴군을 격파한바 있습니다.
특히 1950년9월30일 최초로 원한의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여 원산 함흥 청진지구를 점령하며 송 장군이 진군하는 곳에서는 적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용명을 떨쳤던 것입니다.
휴전직전인 1953년6월13일부터는 중공군과의 화천 지구 전투에서 나는 2군단을 지휘하였고 송 장군은 8사단을 지휘하면서 중공군의 화천「댐」탈취를 목적으로 한 맹렬한 공격 하에 비오 듯 떨어지는 포화를 무릅쓰고 백병전을 강행하면서까지 분전하여 끝까지 화천「댐」을 사수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천 수력발전소를 확보할 수 있게 한 송장군의 공열은 잊을 수 없습니다.
전후에는 3군 단장과 제일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59년3월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면서 일대 정군작업을 감행하여 문난했던 군기를 확립한 일도 영원히 기록될 일입니다.4·19당시에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극도에 달한 혼란을 현명하게 수습한 바도 있습니다.
송장군이 미국「조지·워싱턴」대학에서 점치·경제를 수학 중 나는 주미대사로 있었는데 밤을 새워가며 학업에 열중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뒤 5·16혁명이 나자 귀국하여 내각수반·경제기획원장관을 겸직하여 국정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1952년12월 미국「아이젠하워」대통령이 휴전을 위하여 한국전선을 방문했을 때 송 장군은「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전선상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영어로「고·고·얄루리버」라고 서슴지 않고 발언하여 압록강으로 진격하자는 의지를 솔직 대담하게 토로하여 동석했던 한미 고급장성들을 깜짝 놀라게 한일은 후일에 유명한 회고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솔직 담백하고 국토통일의 강력한 의지와 호쾌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10·26사태이후에는 국정청문위원과 국방정책자문위원으로 활약하시다가 이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슬픈 일입니까. 이제 다시는 송장군의 그 늠름하고 믿음직한 거구와 항상 소년과 같은 티없이 미소짓던 그 정든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충통할 뿐입니다.
송 장군이시여, 부디 가시는 길 평안 하시옵고 안식과 명복을 누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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