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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시간」을 낭비 없이 보내자| 불행한 경험 다시없도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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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학의 문이 다시 열렸다.
민주발전이다 정치발전이다 하여 주로 정치체제의 변화를 갈구한 열기가 학원으로 몰아친 결과는 국정불안의 요인이 되었고 휴업에서 휴교로 번져서 굳게 닫혔던 문이 이제야 다시 활짝 열린 것이다.
잊을 뻔했던 학우들의 얼굴이 밝은 웃음으로 꽃피고 덥석 잡는 악수엔 뜨거운 체온이 흐른다.
씁쓰레, 허전, 실망, 초조로 교직조차 회의하던 교수들의 표정에도 짐작이 간다. 학생 없는 대학, 폐허와 같은 교단에 남았던 교수들의 소생하는 희망과 기쁨이 어느 만큼인가 이미 퇴임한 노교사인 나에게도 피부로 느끼고 남음이 있다.
교육의 정의가 문화유산의 단순한 전달이 아니고, 경험의 재구성으로 새로운 창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요즈음의 정설이 되고 있다.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가 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제자 스스로 나아간다는 원리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그러한 원점에서 나는 열리는 교문에서의「다시 만남」에 대하여 새로운 기대를 갖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간 길이 과연 스승의 가리키는 방향이었던가. 교수가 과연 올바른 방향을 권위로써 가리키고 있었던가. 불행한 경험을 깊이 그리고 겸허하게 자성하고 새로운 결의와 용기로 다짐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퇴계는 도산서원의 학풍을 겸허로 삼은 듯 하다. 사무사(옳지 않음 없음을 깊이 생각하며) 무자기 (스스로를 속임이 없을 것이며)신기독(홀로 삼가 양심에 떳떳할 것)을 내세운 것은 학문하는 자로서의 지신 (몸가짐)을 먼저 경계한 것으로 안다.
대학을 진리탐구의 상아탑이라 우리는 믿어왔다. 그러나 실학이 머리를 든 후부터 이용후생의 학의 비중이 늘고, 뜻(지)을 현실로 돌리게 되자, 이제는 생활기술과 사회봉사가 하나의 목표로서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상아탑이 허물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자아완성이나 자기발현이 자칫 강둔적인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박애의 사회봉사에 이를 때, 이른바 치국평천하를 뜻함으로써 진리의 범주가 확대된 것뿐이다.
그러나 진리는 넓고 깊어 학해로도 비유되어, 정보 정도의 지식으로 깨달을 바 못되며,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새로운 경지가 전개되어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만심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고, 편법이나 묘수도 없고, 겸허하게 배우고 익히는 끈기 이외에 처할 길이 없다.
여기에 길을 가리키는 스승이 필요하고, 스승은 진리를 탐구하는 제자에 힘입어 새로운 길을 동행하니, 만인이 스승이란 말도 여기에서 연유된다.
그러나 궁극은 「소크라테스」의 명언대로 『네 자신을 알라』요, 불법에서 말하는 『내마음이 나의 스승』에 그치고 만다.
나의 경험으로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으로 옮아갈수록 자기수련의 고됨을 느끼면서 보다 큰 희망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약삭빠른 수재들이 자칫 현실을 핑계하는 만심으로 도중 낙오하는 외로움을 많이 겪었다.
청출어감이라 하여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도 교직의 기쁨이겠지만, 학교이외에서 얻어들은 지식이 스승보다 뛰어난다고 스스로 만심하여 가르침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 나아가서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과대망상 하여 지도자연하는 소아병을 볼 때의 외로움은 견딜 수 없었다. 이번의 학원사태에서는 만심을 악용하는 기성인도 있었다.
필부는 겸허를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다. 더구나 진리는 조그만 주관이나 이기심 가지고는 얻을 수 없는, 만인에게 통해야할 공권의 영역인 것이다.
나는 뜻한바 있어 수양으로 바둑을 배운바 있다고 정석이라는 게 그렇게 무미하고도 오묘한 것인 줄을 몰랐다. 잔재주로 따져서 해결하지 못하는 그 많은「수」가 결국은 정석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실인 즉 나는 정석을 무시하여 아직도 상수의 경에 들지 못하고 위기십결의쉬운 대목 사소취대조차 실전에서 잊고 있는 것이다.
학문엔 왕도가 없다. 물론 권도도 없다. 겸허하게 정석을 배우고 배워, 학부염(배움에 싫음이 없고) 교부권 (가르치되 지침이 없다)이 학원의 철칙이지, 스승에게 오만한 제자가 있을 수 없고, 가르침에 주저함이 없는 교권이 반드시 선행되어야한다.
나는 한국에서 근대교육이 갈 길을 명시한 분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한다. 민족존망의 갈림길에서 그는 배워야 살고 힘써 일해야 흥 한다는 정석을 갈파했다.
자아혁신 무실력행-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소명감, 문득 너에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할 때, 나는 무슨 일에 힘쓰고 있노라 떳떳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되라 하였다. 떳떳한 인격, 자주의 사람, 의로운 생활, 부지런한 국민을 그는 조국광복의 참된 저력으로 믿었던 것이다.
대학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학생들이, 교수들이 다시 배움의 문으로 돌아왔다. 「캠퍼스」 의 경사뿐이 아니라 바로 새 시대의 축복의 문이 되어야 하겠다. 다시 어설픈 사회감각과 정치참여로써 학업을 포기하는 문이 되어서야 하겠는가.
묻나니, 그대들 학생과 교수여러분, 겸허와 아량으로 면학을 다짐하여 서로 대하고 질서회복에 동행하려는가? 금쪽같이 귀한 학창생활을 낭비한 공간을 무엇으로 메우려는가?
돌아온 탕아에게 부모는 더욱 애틋한 정을 쏟는다. 하물며 흔들린 사회악의 격랑 속에서 대화 없이 헤어졌던 손과 손은 감정보다도 예지로써 하루 빨리 참된 학문의 보금자리와 탐구의 의지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다. 새 시대 새 질서를 찾는 사회정화의 국민적 여망도 높다. 따뜻한 대화와 명철한 판단으로 이룩된 학원정상화가 한국 재생의 산실이었다는 후세의 사초가 되기를 바란다.
최태호<전경기상고교장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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