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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실패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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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뉴욕 특파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를 이끄는 재닛 옐런 의장에겐 “벨벳 장갑 속 강철 주먹 같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우리 말로 하자면 외유내강이 딱 들어맞는다. 온화한 외모지만 정책을 밀어붙일 때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온다.

 지난 1월 9일 백악관에서 연준 의장 지명 수락 연설을 할 때 옐런은 목메어 했다. “아직도 너무 많은 미국인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고 어떻게 가족들을 부양할까 걱정하고 있다”는 대목에서였다. 눈 밝은 사람이라면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일자리가 충분히 늘어나기 전에는 옐런이 양적완화와 제로금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미국 실업률이 6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금리 인상 요구가 속출하고 있지만 옐런은 요지부동이다.

 그렇다고 연준의 통화정책이 옐런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연준을 움직이는 것은 연준의 목표다. 목표는 최대고용과 물가안정, 두 가지다. 금융위기로 경기가 극도의 침체에 빠지자 연준은 물가 목표치를 인플레이션 2%로 잡았다. 연준의 유례없는 통화량 공급은 목표 달성을 위해 열심히 돈을 풀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런 연준에 대한 시장과 대중의 신뢰는 깊다. 요즘처럼 금리 인상 시기를 놓고 연준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터져나올 때도 연준이 부여된 사명을 향해 충직하게 움직인다는 점은 의심받지 않는다.

 우리 한국은행은 어떤가. 한은엔 물가안정이란 목표가 있다. 안타깝게도 고용 증대 목표는 없다.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이 필사적으로 일자리 창출에 매달리는 것은 주요국의 공통 현상이다. 한은은 목표 설정부터 글로벌 트렌드에 뒤처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물가안정은? 2013~2015년 3년간 한은의 물가안정목표는 소비자물가상승률 기준으로 2.5~3.5%다. 하지만 한국 물가는 지난해 이후 지금까지 18개월째 이 목표 근처에도 못 미치는 1%대 터널에 갇혀 있다. 한은은 물가안정이란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물가가 너무 높은 것도 문제지만 너무 낮아도 문제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를 쓰고 돈을 푸는 것도 바닥 상태인 물가를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경제가 활기차게 돌아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중앙은행도 만능일 수는 없다. 정책 실패가 용인되는 이유다. 그러나 접시를 닦다가 깨는 것과 아예 접시를 닦지 않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한은이 목표 달성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한은은 2013년 5월 딱 한 차례 기준금리를 내렸을 뿐 그뒤로 14개월째 동결 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의지와 노력 부족으로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시장 신뢰는 중앙은행이 구사하는 통화정책 성공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나 스스로 정해놓은 목표를 지키려 하지 않으면서 시장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한은은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책임지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 경제다. 한은의 실패가 초래하는 경제적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이상렬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