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식』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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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주관」이나「객관」은 모두 철학용어다.「주관」이란 말의 어원은「라틴」어의「서브젝툼」.
『근저』,「바탕에 있는 것」,『기체』등의 뜻이다. 이런「서브젝툼」을 철학자들은『인격』이나『느끼고 사유하는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른바『주관식 교육』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바탕을 닦는다는 뜻에서 그것은 바람직한 일 같다.
이런 얘기가 있다. 시골의 어느 국민학교에서『나』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시켰더니, 50분 사이에 백지를 채워놓는 어린이는 60명 가운데 5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거의 백지 그대로 갖고 있었다. 필경「객관식 교육」이란 이름의 OX식 교육이 빚은 결과일 것이다. 이런 일은 서울의 어느 여중에서도 있었다.『우리 아빠』라는 제목의 작문을 내용은 어쨌든 백지를 채워 넣는 정도로 해낸 학생이 15%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국어교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객관식 교육은 단순 암기력만을 위주로 하기 쉬운 결함이 없지 않다. 최근 서울시 교육위는 이린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내년부터「주관식 교육」으로 전환할 구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종래의 부작용들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는 너무 멀다. 그것은 아마 모든 학부모들이 평소에 보고 느끼는 일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우선 한 학급의 학생이 60명 이상이나 되는 현실에서 과연 교사가 자상하고 친절하게「주관식 교육」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앞선다. 솔직이 말해 학우들이 정성을 들여 해간 숙제조차 교사에 의해 제대로 꼼꼼히「체크」가 되는지 궁금할 때가 적지 않다. 성실한 교사들에겐 실례의 말이지만, 매일 그 많은 학우들의 숙제를 구석구석 돌아보기란 여간한 노력과 성의 없이는 어려울 것 같다.
주관식 교육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학급당 학우수가 적어야 한다. 선진국들이 주관식 교육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는 교사의 양식과 성실성이 문제다.「주관」은 학생만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교사에게도 필요하다. 학생의 주관적인 학력과 능력을 허가하는 데는 역시 보편·타당한 주관이 작용해야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교육적 배경」이다. 주관식 교육일수록, 그 학생의 가정 환경과 심적 상태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늘의 실정에서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관찰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결국「주관식 교육」은 뿌리 없는 이상에 불과할 것 같다고 공연히 더 큰 부작용이 없지 않을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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