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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쟁

쉬운 수능으로 가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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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올 11월 치러지는 수능이 쉽게 출제될 것으로 예고되면서 난이도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수능을 출제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6월 실시한 모의평가에서 쉬운 수능의 위력이 이미 공개됐다. 영어 과목에서 만점자가 3만1007명(전체 응시자의 5.37%)이 나와 역대 최다를 기록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단 한 문제를 틀려도 2등급으로, 두 문제를 틀리면 3등급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평가원은 실제 수능도 이 같은 수준의 난이도로 출제할 방침이다. 교육부도 쉬운 수능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쉬운 수능이 수험생의 학습 부담을 줄여주며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능이 쉽게 출제되면 단 한 번의 실수로 시험을 망칠 수 있어 수험생들의 부담이나 사교육비는 줄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또한 영어가 쉽게 출제되면 수학이나 국어 등 다른 과목의 비중이 커지는 풍선효과도 우려되고 있다. 첨예하게 대립 중인 양측의 의견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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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정상화의 시작이다

이성권
대진고 교사(한국교육정책
교사연대 대표)

쉬운 수능이 도마에 올랐다. 지난 6월에 치른 모의평가 영어 과목이 계기가 됐다. 쉬운 수능은 사교육비의 절감을 위해 교육부가 선택한 대책이었다. 하지만 쉬운 수능이 교육계의 선결 과제인 공교육 정상화로 가는 길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생들은 12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사고력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학생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며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다. 더구나 5지선다형 평가는 사고력과 태도를 측정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수능은 대학 진학을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 통용된다.

 경쟁을 통해 효율을 달성하고, 학생을 선발하는 수단으로서 학력평가는 필요하다. 그런데 어려운 수능으로 인해 모든 학교가 입시학원처럼 됐고, 학교 수업은 EBS 문제집과 이를 정리한 참고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능을 쉽게 출제해 학생의 학습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성취감을 조장하는 것이 옳다. 또한 현재 논의 중인 영어의 절대 방식을 국어와 수학으로 확대해야 한다. 이렇게 해 수능은 학생의 기초적인 역량의 평가에 집중해 대부분의 고교가 입시학원화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학교를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교실에서는 토론과 상생의 가치가 살아 숨 쉬게 하고, 교사는 학생들의 온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의 출발점은 수능을 쉽게 출제해 학생의 학습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돕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현재 각종 경계와 구분이 사라지고, 이에 따라 다양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에 맞춰 대입은 종전의 단순한 문제풀이 능력을 측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학생이 미래 사회를 짊어질 융합적 역량과 잠재력,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수능이라는 제도를 통해 국가가 학생의 평가권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대입은 구조적으로 학생의 종합적 역량과 잠재력을 평가할 수 없다.

 결국 고교가 정상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대학이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려면 무엇보다 교사의 학생 평가권을 보장하는 게 우선이다. 교사에게 학생의 평가를 일임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돼야 교사가 학생을 책임지고 지도하고 평가하는 학교교육의 완결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 교사에게 온전한 평가권을 준다는 것은 학생의 학교 내신 성적뿐만 아니라 학교활동 과정과 성과를 구체적으로 관찰, 기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평가한다는 의미다. 대학은 이 자료를 신뢰하고 이것을 근거로 학생을 선발하면 된다. 고교 교육과정의 정상적인 운영과 대학의 자율적인 학생 선발은 현재 대입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이미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교육부가 의도하는 쉬운 수능과 절대평가 방침은 사교육비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다. 하지만 쉬운 수능을 통해 고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동시에 수능 위주의 대학선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학생의 역량을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쉬운 수능을 거쳐 모든 과목에서 절대평가를 실현하고 차후에 수능의 자격 고사화를 달성한다면 이는 학교교육 정상화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 될 것으로 본다.

 결국 공교육이 건강하게 운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교육 증가를 포함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정책당국자는 직시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대입이 고교의 교육과정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쉬운 수능을 통해 고교를 살리고 시대 변화를 선도할 인재를 길러낼 수 있도록 대입의 대전환을 기대한다. 수능은 쉽게 출제하고, 고교 교사는 학생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며, 대학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선발하는 체제가 확대되어야 한다. 힘들게 돌아서 가더라도 정공법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성권 대진고 교사(한국교육정책 교사연대 대표)

공교육 신뢰 떨어뜨린다

김혜남
문일고 교사

정권과 교육정책의 수장이 바뀌면 입시제도가 수시로 바뀐다. 입시제도를 개선하겠다며 내세우는 논리는 기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수험생의 학습 부담 완화’ ‘공교육 정상화’, 그리고 ‘사교육비 경감’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진부한 레퍼토리의 나열이다.

 의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학습 부담은 증폭되고, 교육 현장은 혼란 속으로 빠지며, 수험생은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16차례. 입시정책이 너무도 자주 바뀌어 누더기도 이런 누더기가 없다. 해마다 난이도가 널뛰기식인 수능도 이러한 논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능을 쉽게 출제하면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하고 막연한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잘못된 진단 때문에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쉬운 수능은 변별력을 상실해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으로 전락하고, 두 문제만 틀려도 3등급으로 전락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변별력을 상실한 수능은 학생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결국은 논술로 뒤집겠다는 생각으로 사교육비를 쏟아붓는다.

 쉬운 수능으로 변별력이 떨어져서 동점자가 양산되면 정시에서는 눈치작전이 불가피하다. 공교육의 입시자료를 무력화시켜 진학지도에서 손을 놓게 된다. 결국 불안한 마음에 공교육의 입시역량에 의구심을 보내면서 사교육으로 발길을 돌린다. 물수능이 공교육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순간이다. 정시에서는 고액 컨설팅이 기승을 부려 사교육 시장이 더욱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다 심각한 것은 학생들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능이 쉽게 출제되면 실력보다 운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두 문제 차이로 실수로 인해 영어에서 전교 1등이 20등이 되고 15등이 운 좋게 전교 1등이 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열심히 공부한 것이 죄가 되느냐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억울함을 승복하지 못하는 수험생들은 고교 3년 동안의 등록금의 2~3배나 되는 사교육비를 쏟아야 하는데도 재수의 길을 기꺼이 감수한다. 실력보다 운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의식에 파묻힌다면 이는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능이 쉽게 출제되면 학생들은 학습에 여유 있는 태도로 임한다. 수능은 사고력 측정인데 쉽게 출제된다는 기대감으로 복잡한 사고를 거쳐 푸는 학습을 게을리한다. 쉬운 수능에도 어렵게 공부한 학생이 고득점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이런 학생일수록 실수를 피하고, 문제풀이 위주의 기술로 대박이 가능하다고 유혹하는 사교육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간다.

 또한 특정 과목을 타깃으로 쉽게 내면 풍선효과가 작용한다. 사교육을 잡겠다고 영어를 쉽게 출제하면 탐구나 수학에서 변별력을 키워야 하기에 어려움이 더욱 가중될 수 있다. 수험생활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학부모라면 공감하는 내용이다. 수능이 쉽게 출제되면 학생들에게 점수 상승의 기대감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는 논리에 솔깃할 수 있다. 가채점 결과 좋은 성적에 좋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적표를 받고는 실망 그 자체다. 수능에서 산출되는 점수는 절대적인 점수가 아니라 상대적인 점수이며, 수능은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상대평가에 기반을 둔 시험이다.

 시험은 자신의 정확한 성적과 위치를 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적절한 변별력이 갖춰져야 하고 예측 가능할 수 있어야 시험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불 수능과 물 수능의 널뛰기식의 수능은 최소한 갖춰야 할 시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어려운 수능도, 쉬운 수능도 능사가 아니다. 시험은 실력 차가 반영될 수 있도록 난이도가 적절히 유지되어야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도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정책당국의 취향과 입맛에 맞게 수능 난이도를 가지고 재단되는 관행이 지속된다면 입시 현장은 혼란이 지속될 것이고 후폭풍은 매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김혜남 문일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