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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서 구체제 부정결의…민주화 길터 - 그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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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리스」의 7년 군사정권이 퇴진한 과정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유형을 낳았다.
67년 영관급 장교들이「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위기 속의 국가를 구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 스스로의 실수로 자초한「키프로스」사태로 강적「터키」와의 결전이 임박해서 국가가 정말 위기에 봉착했던 74년7월23일 군부는 손을 들고 물러 났던 것이다.

<위기 앞에 자퇴한 군사정부>민간 정치세력에 대한 무리한 탄압으로 국민들로부터는 물론 국제사회에서조차 고립된「그리스」의 군사정부가 위기의 순간에 취한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의 수수께끼는 후에 풀렸다.
그들은「터키」군이「키프로스」를 침공하고 있는 절대적 위기의 순간에 비밀회의를 열고 어차피 패할 것이 뻔한 전쟁을 했다가 패전의 오명을 쓰고 물러나느니 민간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가 위기가 지나간 후 패배의 책임을 민간 정치인에게 넘기고 3주후에 다시 집권한다는 각본을 짰다고 「선데이·타임즈」지는 군 내부 소식통을 들어 보도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런 각본대로는 되지 않았다고.
군부의 초청으로 망명 생활에서 돌아와 민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민간 지도자「콘스탄티느스·카라만리스」는 『즉각 민주적 합법성을 회복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즉시 군사독재의 가장 가친적 독소부터 재거하기 시작했다.
「이아로스」섬에 갇힌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군사정권에 의해 국적을 박탈당했던 인사들에게 복권조치를 취했다.
계엄령을 해제하고 구 정권에 의해 해임당했던 판사·공무원·교수 등 인사들을 복권시키고 반대로 구 정권이 임명한 인사들은 해임시킴으로써 체제 속에 박혀있던 구 세력의 두드러진 잔재들을 제거했다.

<6개월간 쿠데타미수 4건>그러나 이와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새 민간정부의 행동반경은 제한되어 있었다.
군사정권이 민간세력의 저항에 의해서 밀려난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퇴진한 것이기 때문에 구 세력은 뒷전에서 계속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새 정부는 한편으로 군 부지도층의 처벌과 급속한 민주화로의 제도적 개혁을 원하는 국민의 요구에 순응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지지 세력의 반발을 견제해야하는「평화적 탈 독재과정」의 전형적「딜레머」에 빠졌다. 이「딜레머」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정부는 총선거를 앞당겨 군사정권이 와해된지 4개월만에 실시, 새 정부의 국민적 합법성을 확인했다.
외부 관측통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이 선거에서는 좌파 정당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지 않았고「카라만리스」가 이끄는 중도 노선의 신민주당이 제1당으로 등장, 의석의 3분의2를 점함으로써 순조로운 개혁의 주체가 확립되었다.
군사정권이 물러난지 6개월이 지난 동안에 네 차례의「쿠데타」미수사건이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75년2월24일에 적발된 것인데 6명의 장성과 16명의 영관장교, 5명의 위관장교들이 연루된 군정복귀 기도였다.
이 사건을 전후해서「카라만리스」수상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3주 동안「요트」위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군부의 반발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나타나자 민간 정부에서는 더 이상 군 체제의 주역들을 방치할 수 없게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들의 처벌을 위한 의회 결의였다.
의회는 군사정권의 행위를 처벌할 법적 근거로 이들이 등장한 1967년의 군사「쿠데타」 는 혁명 아닌 단순한「쿠데타」였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문서 하나로 7년간의 군인정치는 불법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으며 그 주역들에 대한 처벌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자신들의 행위가 혁명이었으며 이 혁명은 자체의 법적 정당성을 창조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무죄를 주장한 군 주역들의 입장은 허물어졌다.
그 해 8월23일에 종결된 특수 재판에서 군사정권의 3주역인「파파도풀로스」「마카레조스」「파타코스」는 사형, 실무자 8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각 3주역들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면해줌으로써 이들의 처형이 몰고올 군부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대통령은 의회입법에 거부권>군사정권 시대에 가장 악명을 떨쳤던「이오아니디스」헌병대장은「쿠데타」가담에 대해 종신형을 받은 이외에도 고문, 학생「데모」에 대한 발포 등 잔악행위에 대해 7번의 종신형이 중복적으로 내려졌다. 총선에서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한「카라만리스」의 신민주당은 단독으로 헌법을 입안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되며 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선전포고와 조약의 체결권을 갖는다.
대통령은 의회의 입법에 대해 1차적 거부권 (VETO)을 가지며(의회에서 5분의3, 표결로 이를 번복할 수 있다), 내각에는 주요 정당의 대표를 포합시키도록 하되「공화국이사회」(전대통령·수상·주요정당 당수·국회의장·국회의 신임을 얻은 전 수상으로 구성)와 협의 후 이들을 해임시킬 수 있는 권한도 갖는다.
이와 같은 헌법은「그리스」의 국내 사정으로 볼 때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 없이는 의회민주주의가 지탱할 수 없다는「카라만리스」의 오랜 정치적 신념에서 나온 것인데 야당은 이에 반대했지만 의석이 부족해서 75년6월9일 새 헌법이 집권당 초안대로 공포됐다.
군사정권이 무너진지 5년이 지난 오늘「그리스」정치는 좌우세력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카라만리스」의 은퇴 후에 대한 불안이 일고 있지만 이 헌법이 제정한 민주적「틀」안에서 착실한 민간정치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런던=장두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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