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에 걸맞은 콘텐트 생산 … BBC "모든 프로그램 완전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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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세계 최대의 공영방송, 공정보도의 방송, 세계를 커버하는 방송 등 BBC를 칭찬하는 표현이 많다. 그러나 실제 BBC가 영국 사회에서 대접받는 모습을 보면 약간 사정이 다르다. 왼쪽으로부터는 고루하고 보수적이라 비판받고, 오른쪽에서는 급진적이라 비난받는다. 민영화론도 심심치 않게 제기된다. 나는 BBC의 진면목은 ‘생존’에 있다고 본다. 온갖 정치적 파문을 거치고도 강력하게 살아남는 방송사가 BBC다.

 BBC 생존력의 비밀을 드러낸 사건이 있어 소개한다. 지난 10일 런던시립대학에서 토니 홀 BBC 사장은 BBC 채널과 플랫폼을 완전 개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내부 제작자와 외부 제작자가 BBC 편성에 경쟁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만들며, BBC 제작자가 타 방송사나 플랫폼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것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이름도 근사하게 ‘경쟁과 비교’라 붙였다.

 BBC는 2007년부터 이미 ‘창의적 경쟁의 창문’ 제도를 실행 중이다. 내부 제작은 50%로 한정하고, 독립 제작사에 총 편성시간의 25%를 할애하며, 나머지 25%를 내부 제작자와 독립제작사의 경쟁에 맡기는 방식이다. BBC는 2011~2012년 무려 총 편성시간의 39%를 외주로 편성했다.

 홀 사장은 이제 ‘제한된 경쟁’이 아닌 완전 경쟁을 도입하려 한다. 경쟁을 활성화해 적은 비용으로 더 높은 품질의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셜록’ ‘오피스’ ‘댄싱 위드 더 스타’ 같은 창의적 프로그램이 경쟁에서 나왔다고 믿는 것 같다. 일단 영국 독립제작사들은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BBC 라디오와 온라인도 개방할 수 있다는 발표가 이어지자 소규모 제작자들이 고양됐다. 그렇다면 BBC 내부는 어떨까? 일반 시민들과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떨까?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BBC 편성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선정적인 내용이 많아질 것이라는 염려가 있다. 무조건 경쟁을 강화한다고 해서 ‘방송에 고유한 창의성’이 높아질 리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도 상업적 압박에서 자유로웠던 BBC 특유의 제작문화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심각하다. 1980년대 보수당 정권에서 BBC 제작문화를 악화시켰던 존 버트 사장의 악몽을 재현할 것이라는 악담도 있다.

 그러나 홀 사장은 물러서지 않는다. 목표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수신료에 합당한 가치(value for money)’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한 달에 2만원이 넘는 거액의 BBC 수신료에 걸맞은 콘텐트를 제공하기 위해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혁신적인 편성을 해야 하는데, 경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BBC는 2015년 총선과 2017년 면허장 갱신을 앞두고 있다. BBC는 정부와 협상을 유리하게 맺어 살아남기 위해 혁신적이라는 평판을 쌓으려 한다. 생각해 보면 BBC는 이런 식의 ‘생존을 위한 개혁’을 멈춘 적이 없다. 과거 1980년대 보수당 정권 아래서 제작 혁신을 단행했고, 2000년대 노동당 정권하에서 조직문화 혁신을 부르짖었다. 최근 ‘완전한 실패’라고 비난받은 ‘디지털 미디어 선도(DMI)’도 역시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BBC 개혁은 생존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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