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 속에 성숙… 혼돈 속에 신생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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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오늘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1970년대의 마지막 해를 그 엄청난 변화와 함께 깨끗이 뒤로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창조로 온통 시원스러울 것이 기대되는 1980년대 첫해의 새 봄을 맞이하여 일찍부터 민족의 부심과 곤환에 항상 그 주역을 담당해 온 우리 고려대학교의 제73회 졸업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된 것을 다시없는 영광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앉아있는 바로 이 자리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안암의 언덕입니다.
그러나 이곳 안암의 동산에 머물러 있던 지난 수년 동안 국내외·학내 외로부터 사정없이 몰아닥친 복잡미묘한 사태는 자율을 잃은 타율의 굴레 속에서 마땅히 우리들의 것이어야 할 그 귀중한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활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연히 능동적 주체여야 할 우리 고려대학교가 한때나마 수동적 객체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들을 돌이켜 볼 때 유감스럽기 한이 없을 또한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보다도 미래에 살아야할 젊은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학창시절에 엄청난 기적적 변화를, 불가능이 가능으로, 허황된 꿈이 눈앞의 현실로, 그리고 망각 속의 체념이 당당한 실천으로 구체화되는 무서운 역사의 교훈을 직접보고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여러분이 받는 축복은 그 어느 세대보다도 크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여러분들이 걸어가야 할 머나먼 앞길에는 상상조차 못할 수많은 도전들, 시련들, 그리고 이에 따르는 심각한 위기들, 혼란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어제의 예속이 오늘의 주체로, 어제의 주변이 오늘의 중심으로, 그리고 오늘의 적국은 내일의 선린으로, 오늘의 냉전은 내일의 해빙으로, 또 거꾸로 오늘의 동맹은 내일의 적대로, 오늘의 해빙은 내일의 결전으로,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들이 마구 일어나 그야말로 누구도 바로 앞을 올바르게 내다볼 수 없는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 불안정성의 시대로 마구 달릴 것이 예상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광복이후 36년이 되는 오늘의 이날에 이르기까지 국토의 분단과 남북대치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취해진 신 군사주의, 자체자본 없이 고도성장으로 지향하려는 방책으로 채택된 신중상주의, 그리고 낙후된 상태에서 하향식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짜여진 신 관료주의, 이런 미묘한 한국적 특수상황에 얽매여 살아왔으니 거기에서 얻어진 긍정적 성과도 무시할 수 없으나 그 부작용으로 파생될 수밖에 없었던 각종의 모순, 갈등, 불균형, 특히 빈부격차, 상호불신, 인간상실, 정신적 신체적 공해, 편중, 파행 등등은 그 동안 우리들이 감내해야 했던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그러나 여러분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저 할 것도 없습니다. 고뇌 속에 성숙이 있고, 위기 속에 기회가 있고, 혼돈 속에 오히려 신생이 있고, 심지어 종말론 속에서도 희망의 신학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일체의 기성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에 속합니다마는 오직 하나, 역사의 신만은 굳게 믿습니다.
물론 역사발전에는 기복도 있고 명암도 있는 법입니다.
역사에는 영광도 있고, 치욕도 있고,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고, 전진도 있고, 후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착잡하게 엇갈리는 속에서도 결국 인류역사의 진행과정은 인간자유의 확대, 민주제도의 확립, 만인복두의 실현의 방향으로 한발한발 접근해 가고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오랫동안 끌어온 분단시대의 쓰라린 비극의 마지막 막이 내려지고 드디어 하나의 국민, 하나의 국토, 하나의 통치를 줄거리로 하는 이른바 「하나의 조국」을 위한 새로운 민족 대 「드라마」가 그 서막을 올리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제 풍랑 많은 새 항로에 나서는 젊은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구시대의 유민·잔병으로 탈락함이 없이 항상 새 역사창조의 선민·선구자로 자신 있게 매진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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