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지 않는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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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스라엘」과의 평화회담 주선을 위해「카터」대통령이「카이로」에 왔을 때 「호텔」에서 「사다트」대통령과 전화통화가 안돼 애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사다트」대통령의 딸이 사는 「헬리오폴리스」의 어느 「빌딩」은 31가구가 사는 고급「아파트」인데 전회가 있는 집은 3집뿐이다.
기자가 전화 있는 「아파트」를 구하려하자 먼저 살던 동료들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을 때만 해도 전화사정이 나빴음을 실감하진 못했었다.
전화가 있어도 통화가 거의 안 되기 때문이란다.
국제전화도 안 되는 건 아니다.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는 안 된다. 전신전화국에 가서 신청, 집에 돌아와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기다려야하나. 3시간이라고도 하고 3일이 걸린다고도 한다.
독촉하려면 또 전화국에 가야한다. 그 동안에 집에 전화가 올는지도 모른다. 3일 동안 기다려도 영 안 올는지도 알 수 없다.
한국의 어떤 관리 부인이 자정이후 전신전화국에 직접 가서 서울과 통화한 것과 KOTRA관장이 2만1천원의 「박시시」(팁)를 내고 집에서 국제전화에 성공한 것은 드문 사례에 속한다.
통화가 안 되니 간단한 인사나 문안을 드려도 일일이 차를 타고 가서 해야한다.
비행기표나 「호텔」예약으로부터 시시콜콜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소 가서 물어봐야 한다.
차 타고 갈데 가 많으니 교통 또한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카이로」에 처음 와서 폭주하는 교통량을 보곤 『이 나라 사람들, 꽤 열심히 일하는구나』했다.
서울 인구와 비슷한 「카이로」시지만 차량은 서울의 2배가 넘는 60만대다.
하오 2시에 일을 끝내고 하오 6, 7시에 문을 다시 여는 상점이 태반이라 「러시아워」도 우리 나라 보다 2배나 되는 셈이다.
한번 가서 해결되는 법이 없는 나라라서 「이래저래 차를 타야할 일」이 많고 도로 위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교통난과 주차란, 많은 공휴일 등을 감안하면 이곳에선 하루 한 사람 만나면 그날은 일 많이 한 날이 된다.
「카이로」에 상주하는 한국인상사원들은「1일 1건 주의」를 노력지표로 내걸고 있다.
어느 「바이어」와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그 약속자체가 충분한「1건」으로 성립된다. 일이 빨리 추진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카이로」주재 한국공무원·상사원들은 하나 같이 자기들도 나태해졌다고 자책한다.
「이스라엘」과의 평화회담이 후「사다트」대통령은 『이제는 경제 개발에만 주력하자』고 했다.
경제개발을 위한 각종 청사진이 제시됐는데 전화사정 개선 문제도 대표적인「프로그램」으로 등장, 빈번하게「매스컴」에 올랐다.
통계를 보자.
77년 현재 「이집트」의 전화보유대수는 52만8천 대다. 인구1백명에 전화 1·34대 꼴이다.
한국이 같은 해에 4·3대니까 한국의 3분의 1수준이다. 「이라크」가 6·9대, 「터키」가 2· 5대, 「시리아」가 2·3대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조금 더 높은 「필리핀」 (77년4백12 「달러」, 전화 23·2대)의 20분의 l에 불과하다.
게다가 『보유대수의 60%가 수리를 요한다』고 돼 있다.
전학수요는 해마다 6·8∼8·3%씩 늘어나 77년 현재 30만명 이상의 청약자가 밀려있다.
허약한 경제의 하부구조 등 문제는 이 같이 산적해 있지만 「이집트」의 장래는 오히려 밝다.
민주수의와 번영을 다기는 「사다트」대통령의 집념과 정치적 안정, 낙천적인 「이집트」국민의 대국주의 적인 자부심이 만성적인 전쟁의 불안에 종지부를 찍은 저력으로 작용한 만큼 평화가 정착된 「이집트」는 이제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출발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계속><조동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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