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속의 시대와 공존하는 시조, 그 소리없는 싸움 치열하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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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단법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이우걸)는 시조시인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시조 진흥을 위해 해마다 추천·투표를 통해 우수 시조집과 시조 평론집을 선정한다. 올해는 박명숙(58)씨의 『어머니와 어머니가』(고요아침)가 ‘제2회 올해의 좋은 시조집상’ 수상작으로, 평론가 엄경희(51)씨가 ‘제3회 인산시조평론상’ 수상자로 각각 선정됐다. 한국 시조문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서울 견지동 조계사 한국전통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시조의 날’ 행사에서 진행된다.

‘좋은 시조집상’ 수상 박명숙

박명숙

박명숙씨의 『어머니와 어머니가』는 시조집 제목부터가 긴장감을 자아낸다. 여러 명의 어머니, 심지어는 자아가 둘로 분리된 어머니마저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시집 제목은 맨 앞에 실린 표제시 ‘어머니와 어머니가’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시 속에서 시의 화자는 배고픈 봄날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랑물을 건너는 중이다. 그런데 제목에서 보여준 것처럼 나를 끌고 가는 어머니는 혼자가 아니다. ‘어머니와 어머니’, 즉 복수다.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까마득한 옛날 최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져 내려와 형성된 일종의 집단 모성을 뜻하는 건 아닐까.

 분명한 점은 박씨가 시조의 주제 면에서나 언어적 표현 측면에서나 익숙한 관행, 예측 가능한 도식을 못견뎌한다는 점이다. 시집 앞머리 ‘시인의 말’에 박씨의 그런 날카로운 언어 의식이 드러나 있다.

 ‘내 혀를 쫄쫄 굶겨/말의 허기를 익히리라//말이 차린 식탁을/과객처럼 견디리라’. 요컨대 “호흡과 걸음이 중요한 시조의 생래적인 DNA를 지키면서도, 오늘의 문학을 외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정신을 깨우고 달구는 작업”을 하겠다는 게 박씨의 시론(詩論)이다.

 사실 이런 시적 태도가 박씨의 전유물은 아니다. 현대 시조시인 모두의 공통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박씨는 요즘 시조단이 치르는 미학적 싸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깜부기불’은 그런 고민과 모색 아래 태어난 작품이다.

 ‘어둠이 한밑천이다, 깜부기불은 여전히/잿더미 속 제 몸을 밑불로 삼는다/지금은 현무의 시간, 어둠을 더 벌어야 한다’.

 3수 연시조의 첫 번째 수는 역설을 얘기하고 있다. 깜부기불은 꺼져가는 불이다. 운좋게 공기를 만나 다시 살아날 수도, 반대로 영영 꺼져버릴 수도 있다. 불과 불 아닌 것 사이, 경계의 존재라고 할까.

 그런데 시인은 깜부기불이 앞으로 다시 타오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어둠(죽음)을 더 끌어안아야 한다고 한다. 불을 시조로 바꿔 생각하면, 현대적이기 위해 시조의 전통 형식을 더 철저하게 천착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역시 박씨의 시론이다.

‘인산시조평론상’ 받은 엄경희

엄경희

시 평론가 엄경희(숭실대 국문과 교수)씨는 긴박한 세상 인연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작품 자체 만의 질량을 재는 작업에 전념해 왔다. 현대시 전공자인 그가 시조에 눈길을 준 것은 대략 4, 5년 전부터다. “전통과 현대로 나뉜 강고한 칸막이 체제 안에 갇혀 전통을 모른 채 흘러가는 데서 오는 부채의식을 털고 싶어서”였다. 시조시인 이우걸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으로부터 시조 비평에 힘써달라는 종용성 부탁을 여러 차례 받은 게 직접적인 계기가 돼 시조 평론을 본격적으로 쓰게 됐다.

 현재 우리 문단에 시조 평론가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엄씨가 시조 평론을 일부 포함하고 있는 『해석의 권리』(까만양)와 『전통시학의 근대적 변용과 미적 경향』(인터북스) 두 권의 평론집으로 3회 인산시조평론상을 받은 건 그래서 시장 선점의 효과를 본 측면이 있다.

 엄씨는 균형 잡힌 자신의 평론 글 만큼이나 설득력 있는 논리로 현대시조가 처한 어려움, 희미한 희망, 시조시인과 평론가가 해야 할 일 등을 또박또박 말했다.

 먼저 실태. 시조독자층이 극히 제한적이다. 안일하게 전통만 답습해서는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독자도 떨어져 나갈 판이다.

 엄씨는 “하지만 현대적 감수성의 토대 위에서 전통을 고민하며 그동안 현대시가 놓쳤던 격조와 풍류나 선비 정신 등의 풍모를 획득한 좋은 시조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웃음의 요소가 두드러진 시조시인 이종문씨도 그런 시조를 쓰는 이들 중 하나다. 그의 단시조 ‘밥’을 보자. ‘밥아,//지금 내 입에/들어가고 있는 밥아!/들어가서 마누라를 더 힘차게 때려주고,//쿰쿰한 냄새가 나는 똥이 되어버릴//밥아!’. 엄씨는 “성(性)적인 함의도 거느린 이른바 ‘밥심’을 해학적으로 그려 낡았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시조는 뭔가 엄숙하고 근엄하다는 인상을 유쾌하게 해체한다는 얘기다.

 그는 “박사급 현대시조 연구자들을 우선 육성한 후 고시조 연구자들과 연계해 현대시조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조시인들에게는 “시조가 시조시인 만의 리그로 가서는 안 된다. 보다 독자들을 강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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