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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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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즘 어느 정객이 지방주행을 하며 사행시 한 수를 자작해 화제에 올랐다. 그 가운데 절조는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럭저럭 살아가리』-.
범인의 감각으로는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이방원의 『하여가』를 심중에 새긴 것이라는 「고심」을 보고 문득 고사가 생각난다.
고려말기 이른바 무반과 문반의 암투는 날로 심해 서로 탄핵하는 상소가 그치지 않았다. 문반의 중심 인물은 포은(정몽주)이며 무반은 송헌(이성계)이 이끌고 있었다.
그 무렵의 고려는 원·명 등 대국의 틈바귀에서 난세를 겪고 있었다. 이미 반세기 가까이 몽고와의 싸움으로 고려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 억세고 꿋꿋하던 기상은 몇 풀이나 꺾이고, 궁정엔 낙조의 빛이 역력했다.
포은과 송헌은 친명파로, 적어도 겉으로는 친교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생각이 달랐다. 포은은 고려의 기개만은 지켜야겠다는 충절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송헌의 야망은 그것이 아니었다. 벌써 일각에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부풀고 있었다.
어느 날 송헌은 해주 근교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한 일이 있었다. 포은은 몸져누운 송헌을 문병차 방문했다. 그의 동정을 살필 생각도 한편 없지 않았으리라.
이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반겨 술자리를 마련하고 자못 시흥에 젖었다. 『하여가』는 이 자리에서 포은의 심정을 떠보기 위해 읊은 이방원의 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그 시의「알레고리」(풍유)를 못 알아들을 포은은 아니었다. 그의 화답(?)은 『단심가』로 대신되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의 마음은 추상같았다. 1백년을 두고 얽히고 설켜 함께 누리며 살자는 제의는 이렇게 무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 후의 역사는 익히 아는 일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들이 주고받은 시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오늘 그 감회와 감동은 어느 쪽이 더 깊은 것일까.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럭저럭 살아가리』-.
감히 그 시심의 깊이는 가늠할 길이 없다.
하루하루가 숨차고 버거운 오늘이 다만 돋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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