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1)-영화60년(제67화)(31)전화위복/마지막의 폭풍몰아치는 장면 안나와 일촬영소 송풍기로 다시찍어 큰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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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역에 내리니 양세웅이 마중나와 있었다. 혼자 얼마나고민했는지 며칠 사이에 그의얼굴은 반쪽이 돼 있었다.
둘이서 현장을 맡긴「미즈나까」(수중)현상소로 달려가니현상 책임자「아베」(아부)도딱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현상해놓은「필름」을 살펴보니, 폭풍이 몰아치는 마지막 장면이 맹물로 씻어낸듯 허옇게 돼있었다. 반면에 그 부분만 뺀나머지는 아주 훌륭히 현상돼있었다.
「아베」가『아주 딱하게 되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헛수고였읍니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이감독님, 글쎄 양「상」이「필름」에 그림이 안나온 것을 보고 이 바닥에 쓰러져 졸도를 했답니다』고 들려주었다.
일은 참 어렵게 꼬였다. 이장면을 영화에서 뺄 수는 없는형편. 그렇다고 놀라 졸도까지한 양세웅에게 책임지라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이 장면을 동경에서 다시 찍기로 했다.
현상소에서 일본 송죽영화사「오오후나」(대선) 촬영소가 10여리 떨어져 있어 그 곳을 빌 생각이었다. 그래서「아베」를 보고『당신도 협력해달라』고 부탁했다.「오오후나」촬영소의 시설 이용 교섭은 생각외로 쉽게 됐다.『사정이 그렇게 됐으니 얼마든지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장면에 출연한 독은기와 김한이 일본에오는 일이었다. 나는 서울 영화사에 그간의 사정을 상세히 적고 두 배우를 급히 동경으로보내라고 편지했다. 편지를 보낸 며칠뒤 독은기 김한 두사람은 그 장면 때에 입었던 의상을 준비해 갖고 동경에 왔다.
「오오후나」촬영소의 시설은 훌륭했다. 바람을 일으키는 대형송(시)풍기를 틀어놓고 양세웅이 새로 촬영했다. 촬영은 하룻만에 쉽게 끝났다.「아베」가「필름」을 현상해 보니 아주 훌륭한 그림이었다. 더군다나「오오후나」촬영소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는데, 그 갈대의 흔들림이 폭풍의 효과를더욱 실감나게 했다.
한고비 소동은 있었지만 영화로서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현장이 끝난 뒤 그동안 수고해준「아베」와 함께 술집으로가 조촐한 술상을마련, 그의 노고에 보답했다.
귀국한뒤『새출발』은 명치좌(전 명동 국립극장)에서 개봉됐다. 그런 고생을 한 덕분인지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새출발』을 끝낸 뒤 나는 큰 슬픔을 당했다. 평생을 속고 기다리며 살아오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40년 8월10일, 어머님의 연세 63세때였다.
임종직전 어머님은 유언을 남기셨다. 그것은『후생에선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한마디었다. 죽음이란 이렇게 간결하고 조용히 끝나는 것일까.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유골을 안고 선산이 있는 경북 경산으로 내려가 아버님무덤맞은 편에 안장했다.
슬픔이 크면 눈물도 쉬 나오지 않는 법인가. 솔바람 소리만『우우』하고 들릴뿐 산속은 잠자는듯 고요했다. 등성이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니 흰구름만 몇점 두둥실 남으로 흐르고 있었다.
한나절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해질 녘에야 일어섰다. 어머님 무덤을 다시 살펴보고 돌아서는데, 그때서야 북받치는 슬픔으로 눈물이 The아졌다. 눈물에 가려 뿌옇게 보이는 산길을 몇차례나 넘어지며 마을로내려왔다.
서울에 온 날부터 나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드리는 기도가 하나 있다. 일과가 이 기도로시작되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뒤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이 기도만은빠뜨리지 않고 있다. 어머님을 추모하고 어머님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로서『가엾이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주시고, 남자로 환생해서 행복되게 해주십시오』란 내용이다. 이 기원은 내가 일제말 징용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하던 1년반 동안에도 계속되었으며 내 생활의 일부가 돼버렸다.
그러나 이 불효자의 축원이얼마나 효험이 있을는지. 축원을드릴 때마다 불효했던 회한이 다시 살아나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나도 이제 곧 세상을 뜰 나이. 저승에 가서야 어머님을 뵙고 이승에서 못다한 나의 효성을 드릴 수 있을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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