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장수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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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0년대」가 열렸다. 모두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편다.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가득하다. 「성장」 위주의 한 연대를 지나면서「물질」쪽을 뗘난 다른 한쪽에는 찌들고 그늘진 데가 많았으나 이제 그런 곳을 바로 펴고 햇살이 들도록 해야할 때다. 「건강사회」-. 어느 한쪽만이 아닌 전체가 건강한 사회, 어느 한곳의 기울음이 없이 고루 발전하는 사회를 시민들은 바란다. 그러한 시민의 염원이 한발짝씩 실현되고 있는 「현장」을 가 본다.
『모든 사회가 두루 건강해야해.』 장수촌의 고로(고노)들은 80년대의 문을 여는 경신년 첫날에 새해소망을 이렇게 편다.
우리나라 최대의 장수마을인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함덕리-. 제주시에서 동족으로 14km떨어진 곳이다.
부석 (부석) 으로 듬성듬성 쌓아올린 돌담을 바닷바람이 만지고 지나간다.
1천3백12가구 5천7백79명의 주민가운데 80세이상된 할아버지만 97명이나 되며 60세이상은 5백38명(남1백58명·여3백80명)이다. 최고령 할아버지는 올해 아흔다섯살의 송경옹 (함덕리3구)-.
『여기를 장수마을이라고 한다더구먼. 마음이 젊으니 오래 살지…] 송옹의 말이다.
마음이 젊은것은 나이가 많아도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수촌의 노인들은 장남이라도 결혼하면 분가를 시키고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때까지 농사를 짓는다. 83세의 김세정옹 (함덕리1구)은 밭농사 10마지기를 지으며 부인 김옥진할머니(69) 와 함께 산다.
제주시에서 선박업을 하며 부유하게 사는 아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일하지 않고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김장현옹 (79· 함덕리1497)과 부인 김병호할머니(76)는 제주시에 사는 아들집에서 몇 달을 살다 도로 함덕리로 돌아왔다. 일하지 않고는 건강을 지탱할 수 없다며 귀향한 뒤로 밭일에 더욱 열심이다.
장수촌의 고로들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편안만 찾으려는 도시민들을 나무랐다. 장수촌의 노인들에게는 일이 생활이며 생활전부가 운동이다.
함덕리 장수마을은 예부터 야채와 수박·오이등을 나지(나지) 재배해 제주도일원에 공급하는 바닷가 마을이다. 논이 없는 마을이라 브리가주식으로 되어있다.
『혼참때는 보리밥이영 곱대사니영하영 먹어수다』 최고령의 송경옹은 젊었을때 보리밥하고 마늘을 많이 먹어 건강이 좋다고 했다.
요즘도 쌀과 잡곡을 50%씩 섞어 먹는 것이 주민들의 관습이다. 반찬은 톳과 맡·미역등의 해조류. 또 하루 한끼 정도는 바닷고기가 식탁에 오른다. 겨울철에는 「눈맞은 배추쌈」을 즐겨먹는다. 겨울철에도 배추와 무가 밭에서 파랗게 자라 특별히 김장을 하는 일이 없다.
장수마을의 주민들은 이렇듯 철저하게 자연식을 즐긴다. 쇠그기나 돼지고기는 제사때만 먹는다. 소득이 높아진 요즘에도 일부러 고기류를 자주 먹지 않는다.
장수마을의 또한가지 자랑은 「사태물」과 「곤두물」이다. 마을 식수원인 두 우물은 한라산 백록담에서 흘러내린 지하수가 용수(용수)되고 있는 것이라고 고로들은 설명한다. 수질검사를 해보진 않았으나 철분이 많은 약수로 이물을 늘 마시는 마을사람들이 건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름에는 얼음물처럼 차고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이 우물물을 노인들은 새벽녘에 한주발씩 마시고 허벙(질항아리)에 길어나른다.
장수마을의 주민들은 제주의 갯바람을 맞으며 노소가 함께 열심히 일하고 먹는것은 공해없는 자연식이며 거기에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한국제일의 장수마을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것만이 건강의 비법이 아니다. 장수마을에는 엄한 계율이 있다. 「3소1다」 의 계율이다. 술과 음식은 적게 먹고 필요없는 말을 않아야 하며 그 반면 땀을 많이 흘려야 한다는 생활지표다. 장수마을에서는 혼례나 회갑같은 마을잔치가 벌어져도 취해서 흥얼거리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으례 잔치에는 있을법한 말다툼 한마디 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타이르지 않아도 생활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이 「3소1다」의 계율을 가정마다 어릴때부터 엄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계율은 장수마을의 건강을 지탱해주는 정신적지주가 돼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장수마을에 최근들어 걱정이 생겼다. 73년 마을앞 해변이 해수욕장으로 개발되면서 도시민들이 몰려들어 젊은이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생활풍습을 외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의 60세이상된 노인들은 3년전부터 함덕리 노인정화위원희(대표 현제선·64)를 만들어 여름철이면 해수욕장으로 나가 쓰레기도 줍고 청소년선도활동을 펴고 있다.
『몸만 건강해서 뭘하나. 마음이 건강해야지. 』 95세의 송경할아버지는 새해를 맞으면서 마음은 한살 더 젊어졌다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제주=김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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